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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찌 Jun 16. 2023

신뢰라는 무형의 자산에 대하여

신뢰 자산이 축적되고 무너지는 과정

런웨이가 끝났다.

내일은 최후의 만찬이다.


우리 팀은 2년동안 서로를 '믿으며' 일을 해왔다. 나와 대표는 개발을 모르니 개발자들의 말을 믿었고, 개발자들은 경영/마케팅을 모르니 우리를 응원하며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이 성공보단 실패에 가깝다보니 그간의 신뢰 관계는 서로에게 별달리 위로가 되지도 못할 농담으로 마무리될 터였다.


"지금껏 그가 제작진에 발신해온 것이 신뢰였는지 방임이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책 <크래프톤웨이>에 나오는 문장이다. 3년, 300억을 들여 초대형 MMORPG를 만들겠다는 블루홀 스튜디오(현 크래프톤)의 야심찬 계획이 OBT(오픈베타서비스)를 앞두고 무너지는 순간이 있었다. '노터치 개발', '개발과 경영의 분리'를 목표로 R&R을 철저히 나눠 각자의 일에 매진한 블루홀이었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은 개발 결과물과 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이는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었다. 결국 개발을 진두지휘한 박용현은 이사회의 결정에 의해 자리를 내놓게 된다. 3년을 내리 개발에 몰두한 수장이 런칭 1개월 전 떠나게 된 것이다.


우리 팀은 (훨씬 소규모지만) 블루홀의 실수를 재현했다. 우리는 서로를 믿는다는 명목하에 견제의 순기능을 망각했다. 초기 스타트업인만큼 비전과 미션을 심도있게 공유하고 공감해야한다는 것도 남의 회사 일이었다. 나와 대표는 개발팀은 '몰라도 되는' 일들이 있다고 생각했고 개발팀은 우리가 '몰라서 그러는' 일들에 대해선 자체적으로 업무를 봤다.


소통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은 시간과 노동력이 드는 일이었다. 속도가 중요하다는 이유로 각자 나름의 전권을 쥐었지만, 우리에겐 '신뢰 자산'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책 <유난한 도전>에서 접한 이 개념은 토스팀 내에서는 꽤나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토스팀 다수가 반대하는 안건에 이승건 대표가 의지로 밀어붙이는 경우에 이승건 대표 스스로 "저의 신뢰 자산을 일부 소진하더라도"라는 표현을 썼다. 마치 장부에 신뢰 자산 얼마, 신뢰 부채 얼마라고 찍힌 것처럼 표현하는 게 상당히 낯설었다.


지금은 내 방식대로 신뢰자산을 이렇게 정의해본다.

조직 내에서 신뢰자산은 2가지를 포괄한다.

1. 인간적인 신뢰 : 대상이 가진 직관, 감각, 가치관, 사상, 판단력, 정직함에 대한 믿음

2. 업무적인 신뢰 : 대상이 가진 정보, 논리, 경험, 경력, 추진력, 문제해결력에 대한 믿음


스타트업의 핵심 인력은 이 두 축에서 모두 높은 수준의 신뢰 자산을 쌓아야 한다. 이는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함께 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축적된다. 둘 중에 뭐가 더 중요하느냐를 뽑으라면 2번일 것 같다. 2번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엔 업무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게다가 강도 높은 업무는 사람의 본성을 이끌어내니, 1번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뢰자산은 주기적으로 '정산'되어야 한다. 성과 측정과 보고가 그 의례에 해당한다. 단순히 숫자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숫자를 책임지는 자세에 대해서도 우리는 유의깊게 봐야 할 것이다. 신뢰라는 것은 생각보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에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 자산이 고갈됐다는 신호만큼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릴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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