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emi Lee May 06. 2024

무에타이는 몹시 어렵다

   

 나는 평생 무도인으로 살았다. 잠시 운동을 쉬었을 때는 스스로 무도인이라 칭하는 내가 부끄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당당하다. 무에타이를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한 지 1년 가까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과도기 단계의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특히 요즘은 무에타이가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 마음처럼 잘 되지 않는 것이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 답답함이, 어려움이 너무 재밌다. 쉽게만 얻어지는 것은 어쩐지 시시하다.     


 나는 평생 무술을 하고 사는 무도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 시작은 초등학생 때 본 중국 드라마 포청천과 칠협오의였다. 굳이 그보다 전을 꼽자면 일곱 살 때 본 우주특공대 바이오맨이었다. 몹시도 강해지고 싶었다. 여전사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강해져서 뭐에 쓸 건지는 나도 몰랐다.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고 싶었으니까. 나는 참 착실하게 꿈을 이루며 살았다. 보통은 꿈을 가슴에 묻고들 살던데 나는 부모님 뒷목을 여러 번 잡게 만든 후 태극권을 전공하겠다면서 중국으로 날아가 버렸고, 3년 후 국가대표가 되어 태릉을 거쳐 아시안게임을 출전하는 기염을 토했다. 우리 집안에는 체육인이 단 한 명도 없다. 그 의미는 나는 운동을 할만한 타고난 재능이 없었다는 것이다. 기초 체력이 약했고 통뼈가 아니라 조금만 해도 지쳤다. 그럼에도 할 줄 아는 기술은 무술 밖에 없었으므로, 은퇴 후 내가 한 일은 온라인 무술용품점을 여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팔리지 않자 해외에도 팔았다. 온라인판매 초창기 시절이라 먹고살 만했다. 그러던 중 북경체대 선배가 하는 무에타이 킥복싱 체육관을 다녔다. 진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아다녔다. 중국무술 우슈로, 업계 전문용어로 ‘내공’을 쌓았다면, 태국무술 무에타이는 ‘실전’ 그 자체였다.      


 그리고는 북경체대 선배와, 태극권을 했던 선배가 함께 모여 일을 하게 되었다. 이런 것을 끼리끼리라고 부르던가. 우리는 격투기 용품 전체를 총괄 판매하게 되었다. 무에타이에 대한 나의 이해는 한층 깊어졌다. 전설의 태국 선수들의 스토리와 강함에 빠져들었다. 그들의 강함은 보통의 인간으로 태어난 내가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인간이 무언가에 심취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내가 무에타이 ‘뽕’을 맞고 이미 30대가 된 나이에 대회에 나가 보겠다고 설치차 선배는 나에게 자중할 것을 권했다. 챔피언이 되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그저 한 번 실컷 맞으며 경험하고 싶다고 하자, 이제는 뼈가 부러져도 쉽게 안 붙을 나이라며 더 말렸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는 없어서 나의 무술에 대한 갈증을 글로 풀기 시작했다. 때는 소설가로 등단을 한 지 2년이 지난 시점이었는데 처음으로 무려 A4용지 100장 분량의 무예 장편소설을 쓴 것이다. 제목은 <강호에 비파소리> 27살 때 처음 내가 열었던 우슈용품점의 이름과 꼭 같았다. 이 작품으로 ‘무예소설 문학상’을 받았다. 시상식에서 담당자는 어떻게 여자가 무예소설을 쓸 수 있었냐고, 얼마나 자료조사를 많이 한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답했다. ‘제 전공인디요?’ 작품에서의 주인공은 중국무술과 태국무술을 섭렵한 대가가 된다. 현실에서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작품 속의 주인공이 이루어 주었다. 그렇게 대리만족이라도 하고 나니 마치 내가 이룬 것처럼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상은받았으나 아직 책 출간은 되지 못했다. 아마 무예소설이라는 특성상 상업성이 없었겠지. 작품은 서랍 속에 고이 묻혀 있다. 언젠가 시기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 소설 작품 속의 주인공은 싸우고 싶어 환장하며 불같이 살다가 결국 평온하게 후학양성에 힘쓰기로 하고 제자들을 기른다. 그런데 소설에서 일어난 일처럼 최근 우리 회사에서 진짜 무에타이 체육관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초등부를 맡는 ‘보조 선생님’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아이들에게 무에타이 스피릿을 심어주느라 꽤 고민도 많이 했다. 영상을 보여주고, 너희들은 무도인이라는 자부심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 무도인으로서의 인성과 의리, 사람됨을 알려주는 것, 아프고 힘들어도 참을 수 있는 법, 아파도 울지 않는 강한 어린이가 되는 법을 알려주었다. 정작 나는 조금만 다쳐도 여전히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아이들이 집에 가고 성인부 시간이 되면 나는 여느 회원들과 다를 것 없이 몸을 풀고 샌드백과 싸우기 시작한다. 남들과 싸우다 괜히 뼈가 부러지면 안 붙을지도 모르므로 샌드백을 앞에 두고 나 자신과 싸운다. 핸드랩을 감고, 보호대를 차고. 참 어려운 시간이다.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보지만 싸우는 리듬을 익히고 정확하게 타이밍을 보아서 주먹을 꽂는 연습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가끔 선배가 미트를 잡아주며 무시한다. ‘야, 너는 그냥 ‘인자약’이라 안돼.’ 그렇지만 그래도 또 한다. 어차피 현실 세계에서 내가 누구와 싸울 일은 극히 드물고 그렇다고 해도 영화처럼 싸워지지 않을 것이므로. 하지만 그럼에도 나 자신의 한계를 넘고 강해지고 싶은 건 순전히 내 맘이다. 누구나 기본기를 배운 상태에서 비슷하게 흉내는 내겠지만, 여기서 깊이 있게 이해하고 한 끗 차이의 깊이를 표현해 내는 것은 가르쳐 줄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것. 그저 내가 몸으로 연구하고 체득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연걸과 일반인이 같은 우슈 동작을 해도 전혀 다른 느낌을 내듯. 똑같은 엘리제를 위하여 피아노곡을 쳐도 초등학생이 치는 것과 피아니스트가 치는 느낌이 다르듯. 과연 나는 어떻게 그 깊이를 낼 것인가.


 처음 우슈 태극권을 배울 때에도 내 관장님은 기본 투로만 알려주시며 그저 연습을 하라셨다. 처음엔 왜 디테일을 알려주지 않고 연습만 죽어라 시키는지 알 수 없었다. 귀로 듣고, 머리로 생각하는 것 외에 그저 연습을 해서 만들어지는 쿵푸라는 것이 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관장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연습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확신이 있기에 알아서 연습한다. 내가 원투를 10만 번 하면, 킥을 100만 번 때리면, 갈고닦아진 내 운동은 정말로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이에 첩경은 없다. 그런데 우리 체육관을 나오는 사람들도 다 나와 같이 무술에 진심인 걸까? 나보다 더 열심히 하는 성인 남녀들을 보면 ‘현타’가 오기도 한다. 간혹 즐거우려고 체육관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럴 때 체육관의 총관장을 맡고 있는 선배는 정중하게 다른 곳을 권해 주기도 한다. 운동의 목적이 각각 다르겠지만 우리 쪽은 좀 더 무술심화적인 체육관인 것 같다. 그렇지만 다이어트? 건강? 이런 건 열심히 하다 보면 그냥 기본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즘은 약간 장비병이 도져서 무에타이 티셔츠를 모으거나 커스텀 글러브를 맞추며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무에타이 티셔츠를 입고 가면 일고, 여덟 살 된 제자들이 ‘우와, 코치님 이거 어디서 사셨어요? 엄청 멋져요.’라 해준다. 그 맛에 구매한다.


 사람 인생이 어쩜 이렇게 평생 무술을 하며 살 수 있단 말이냐. 나는 내가 무술을 하고 살 수 있게 된 배경을 본 후, 무엇이든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은 할 수 있는 거라고 믿는다. 진짜 하고 싶은 건 하면, 된다. 나는 내 인생을 정말 사랑한다. 이렇게 푹 빠져 살 수 있는 시간이 흔치 않으니, 기회가 왔을 때 뼈가 닳도록 끝까지 더 해 봐야겠다.     





몇 년 전 무에타이 체육관을 처음 다닌 지 얼마 안 되어 쓴 글입니다.

https://brunch.co.kr/@wushuwriter/57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이토록 즐거운 것이었다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