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다닌다. 참 좋은 시절을 타고났다. 이번에는 전북 한 달 살기에 선정이 되어 전주 한옥마을 근처의 숙소를 잡았다. 지도로 전북 전체를 한 바퀴 다 돌았다. 숙소도 이 잡듯이 뒤져 알아보았다. 그러나 역시 여행지가 몰린 지역의 숙소 잡기가 가장 쉬웠다. 함양과 함안, 그리고 태안에서 살 적에는 아무것도 없는 외딴곳에 있는 숙소를 잡았다. 그런데 처음으로 북적거리는 전주 최대 관광지, 한옥마을이 바로 앞에 내다 보이는 곳에 숙소를 잡게 된 것이다. 새로운 동네에 짐을 풀고 ‘나 이제 여기서 한 달 살 거다’, 작정하는 마음이 얼마나 설레는지 모른다. 숙소에서 한옥마을을 나가는 입구를 찾지 못해 한 블록을 빙 둘렀다. 그 마저도 여행이 되는 것이 여행 첫날의 기분이다. 사방이 새롭다. 주차장을 가는 길도, 로비를 찾는 일도. 그런 새로움이 자꾸만 나를 채근한다. 떠나라고, 이번엔 또 어딜 갈 거냐고. 고대 배경으로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은 한옥마을을 둘러보니 혼자라는 것이 새삼 아쉬웠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음 주에 당장 전주로 와서 며칠 묵고 가라고. 기가 막히다고.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이 휙휙 지나간다. 나는 삼각대를 미처 챙기지 못해 힘들게 사진을 찍고 있는 한복 입은 커플에게 다가가 먼저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제안한다. 여행에 들뜬 사람들이 저마다 상기된 얼굴을 하고 지나간다. 나도 신나는 마음에 골목골목을 다 둘러본다. 자주 가는 편의점이 생겼다. 역시 첫날은 두리번거리지만 이내 편의점마저 익숙해져 우유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좋아하는 과자가 어디 있는지 익숙하게 찾게 된다. 새로운 곳을 익숙한 곳으로 만드는 절차다.
지난 2월, 호텔 프린스의 <소설가의 방>에 입주한 이후 호텔의 매력에 완전 매료되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호텔을 찾는지 알겠다. 나는 한 달 살기란 무릇 낡디 낡은 민박집을 선택해서 시골의 참맛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물론 함양에서 얻었던 민박집은 너무나 완벽했던 곳이라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직접 경험해 보고 나니 청소도, 분리수거도, 이부자리 정리까지 해 주는 호텔 생활이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밥을 하지 않고 설거지를 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세상은 살아진다. 특히 일을 하고 글을 쓸 목적으로 다니며 매일 시간이 없어서 한 시간 단위로 스케줄을 세워 사는 나에게는 더욱 편리했다. 집에서는 아무리 로봇청소기를 돌리고 식기세척기를 돌려도 매일 집안일에 소요되는 시간이 30분은 걸렸다. 가만 누워서 휴식을 하더라도 매일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잡일 하는 시간을 돈과 바꿀 수 있다면 기꺼이 지불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게다가 이번엔 작게나마 헬스장이 있는 호텔을 골랐다. 아령을 가지고 갈 필요도 없고 운동을 하러 부러 집 밖을 나설 필요도 없었다. 최대한 시간을 아껴 일하고 글 쓰고 밥 먹고 그리고 여행을 했다. 정말 이곳에 사는 사람처럼 식당을 물색하고 카페를 고르고 서점을 다녔다.
회관이라 이름이 붙어 있는 30년 넘는 식당,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낡은 간판들이 즐비했다. 빠르게 휙휙 바뀌고 있는 세상 속에 전주는 전통을 많이 지키고 있는 도시였다. 그것은 비단 작정하고 꾸민 한옥마을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 30년쯤 된 식당들을 돌며 나는 맛의 신세계를 알았다. 역시 전라도는 맛의 도시였다. 먹을거리들이 입에 착착 감겼다.
며칠이 지나고 엄마가 왔다. 함께 한옥마을을 둘러보고 전주부터 완주까지 구경을 했다. 한 달쯤 살고 나니 새롭기만 하던 낯선 도시가 엄마에게 가이드를 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익숙해질 즈음이 되니 그 도시를 떠날 때가 되었다.
여행지에서, 수학자 장준이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 그 문제에 몰두하며 매일 같은 식당에 들러 같은 밥을 먹고 정해진 루틴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뇌에게 새로운 영역을 주기 위해 그 외의 모든 일상은 단조롭게 바꾼다는 것이다. 주기적으로 집을 떠나 돌아다니는 데에 재미를 붙인 지 1년이 넘어간다. 나의 방랑에 쉼표를 찍어줄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여행을 자꾸 떠난다면 그것 역시 반복일 뿐이다. 한동안은 한 가지 루틴으로 살아 보아야겠다. 최소한 하반기에는 어딜 못 떠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냥 지금 생각은 그렇다. 나중에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현재 나의 마음 상태는 그러하다. 아 아직 가 볼 곳이 많은데 이로써 내 여행이 땡치는 건 아닐까. 여행을 다니며 언젠가 지쳐서 이 여행을 그만둘 때가 오겠지 생각한 적이 있는데 혹 지금이 그때가 아닐까. 하지만 나중에 어떻게 되든 말든 지금은 지금 마음을 즐기면 된다. 나중에 마음 바뀐다고 어느 누가 와서 때리는 것도 아닐 테고.
직접 가 보기 전까지 낯선 지방의 주소는 글씨로 보였다. 그런데 다녀오고 나서는 그 동네가 이미지로 떠오른다. 특히 이렇듯 한 달씩 장기 체류를 한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이미지뿐이랴, 날씨와 습도의 체감, 사람들의 말투, 특성. 다녀올 때마다 브이로그를 찍고 글로 남기는 것은 나를 위함이 가장 클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작가들이 많이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구나. 내 방에만 갇혀서 글을 쓰는 것이 전부가 아닐 테다.
한국에서 놀러 다닌 이야기, 방문했던 시골 이야기는 되도록 오래오래 쓰고 싶다. 더 나이가 들어도 다른 도시로 또 다른 도시로 이동하면서 나이가 들어서 느끼는 또 다른 새로움을 느끼고 싶다. 다만 지금은 잠시 스스로에게 휴식을 주기로 한다. 다음에 또 떠날 곳이 없다니, 모처럼 마음에 여유가 생긴 기분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sezVPr7LIa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