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이용하는 도서관의 홈페이지에 소장 도서의 권수가 표기되어 있다. 약 21만 권. 세상에. 21만 권이라니. 이 중에 나는 고작 몇 권을 읽은 건가. 일 년에 100권의 책을 읽는다고 해도 전 세계의 무수한 책 중 아주 한 모퉁이일 뿐인 것을. 애써 읽어봐야 평생 몇 권 읽지 못할 텐데 책장 안 넘어가는 책을 부여잡고 끙끙 앓을 필요가 있을까. 특히, 재미없는 책도 끝까지 읽어야 좋은 거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후, 나의 독서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미리 밝혀두지만 나는 책 자체를 무척 사랑하고 아낀다. 책 읽기 싫어서 꼼수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늘 과하게 많은 책을 빌리거나 사서 쟁여놓고 본다. 쌓아놓은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다. 좋은 책을 고르고, 책 표지를 쓰다듬고, 작가의 머리말을 읽고. 그리고 끝까지 잘 읽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본다. 조금 훑어보고 마음에 드는 책만 읽는다. 10권을 뒤적이면 보통 한 두 권 정도만 끝까지 읽게 된다. 그리고 한 30권을 뒤적였을 때 그중 한 두권 정도가 마음에 쏙 들게 되고 그런 책에게는 내 책장의 한 공간을 내어준다. 물론 책장에 꽂힌 책 중에서도 끝까지 안 읽은 책이 2할은 된다. 소장은 해야 할 좋은 책인 것 같은데, 일단 사고 보는 책들 때문이다. 물리학 관련 주제이거나 난해한 고전 소설과 같은 종류라 완독 하기 쉽지 않지만, 어느 날 반짝하고 느낌이 오면 몇 년 만에 읽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사놓고 10년 동안 비닐포장도 안 벗긴 책도 있다. 동생과 같이 가서 산 책이었는데, 우리 집에 올 때마다 그 책을 보고 아직도 안 읽었냐며 놀린다. 여태껏 읽지는 못했지만 동생의 지청구가 무서워 껍데기만 벗겨놓았다. 그 책의 제목은 <이방인>과 <야간비행>이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독자 축에 속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고 한 번에 머리를 딱 치는 그런 책들이 좋다. 나를 책 끝까지 데려가지 못하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작가의 잘못이다. 재미없는데 어떻게 참고 끝까지 보란 말이야. 세상에는 더 재미있는 수많은 책들이 있을지도 모르므로 더욱 많은 책을 스쳐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힘들게 끝까지 읽은 책은 결국은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므로. 그러니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네 하며, 눈에 들어오지 않는 글을 꾸역꾸역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책에 할애하는 시간을 생각해 보면, 좋은 책을 고르거나 쇼핑하는 시간이 제일 많고, 그다음이 책상에 쌓아놓은 책을 열었다 덮었다 하는 시간. 그다음으로 한 권을 끝까지 완독 하는 시간이 제일 적다. 한 번 빠져들면 두세 시간이면 한 권을 읽을 수 있는데 (그렇다. 나는 책도 무척 빨리 읽는다. 읽다가 진도가 안 나가는 부분은 과감하게 넘긴다. 어차피 읽어봤자 기억에도 남지 않으니까.)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리에 앉아서 한 호흡으로 읽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나 자체가 워낙 산만하기도 하고 책을 읽다가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인터넷 검색을 하거나 다른 책을 찾아보거나 메모를 하거나 그 책에서 받은 영감으로 나의 글을 쓰거나 하며 시간을 무한정 지체하기 때문이다. 책은 주로 침대에 누워서 자기 전에 읽으면 가장 집중이 안되고 (클클클) 옷방의 소파에서 읽거나, 옷방 바닥에 이불을 깔아놓고 스탠드만 켜고 읽는 재미도 그만이다. 물론 이때는 핸드폰을 다른 방으로 던져 버려야 한다. 하지만 역시 책 읽는 집중력이 가장 높을 때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때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무언가를 기다려야 할 때, 그리고 긴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릴 때 은근히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이 시간에만 책을 읽어도 하루 10페이지는 뚝딱 읽는다. 그러다 좋은 책이 걸리면 화장대 앞에 앉아서 엉덩이를 떼지 못함은 물론이다. 거의 매일 화장대 앞에서 새로운 책을 펼치며 신세계에 빠져든다. 그러니 1년에 300권 정도의 책이 내 손을 거쳐가는 것이 무리는 아닌 것이다. 드라이를 하는 10분 동안 나를 사로잡지 못하면 드라이가 끝난 후 끝까지 한 번 드르륵 넘겨보고 도서관에 반납하거나 중고서점에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예측하셨을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내 머리의 드라이 상태는 늘 엉망이다.
이렇게 읽는 습관이 일단 들고 보면 몇 해 전에는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던 책도 하나씩 이해하게 된다. 월든이 그랬고 군주론이 그랬다. 어릴 적에는 몇 페이지 넘기고 덮기 일쑤였지만, 세월에 따른 나의 관록이 힘인 것인지 독서능력이 향상된 것인지 지금은 정말 좋아하는 책 중 하나가 되었다. 어렵다고 버리지 않고 수년간 책장에 꽂아 둔 덕이다.
사람을 만나보면 나랑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책을 만나보면 나랑 마음이 통하는 책이 있고 그렇지 않은 책이 있다. 모두가 좋다는 책이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다. '너 그 책도 안 읽어 봤어?' 내 마음에 안 드는데 어쩌란 말인가. 필수 독서 목록이라니. 그건 어떤 선생님의 지침이신지. 유명한 누군가 읽었다니. 내가 왜 그분들을 따라 해야 하지? (^^) 다소 까다로운 독자인 것 같으나, 실제 내가 읽는 책들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가볍디 가벼운 책부터 독서라고 이름 붙이기 뭣할 만큼 실용적인 비법책들, 그리고 특정 주제에 하나 꽂히면 그와 관련된 모든 책들을 모조리 뒤져보는 것과 같은 식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추천하는 책들도 많이 읽는다. 베스트셀러 중 손이 가는 책도 많다. 책을 고를 때는 80% 제목을 보고 선택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 여름, 장사, 경제경영, 물리학, 시 와 같은 주제면 일단 들춰 본다. 그에 반해 내가 관심 없는 것들 - 여행, 종교, 페미니즘, 인권 등의 뉘앙스를 풍기면 왠지 흥미를 잃는다. 각자의 취향을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과연 사람들이 많이 읽은 책이 좋은 책일까. 좋은 책의 기준은 무엇일까. 누구에게라도 가닿으면 되는 것이고, 누군가 그 책으로 인해 영향을 받았다면 좋은 책 아니겠는가. 작가의 말이 나의 머리를 건드리진 못해도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면.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책을 접하고 더 많은 책에 손때를 묻혀야 하는 것이 평생 최대한 좋은 책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죽을 때까지 몇 권 만나지 못할 책들, 이렇게 내 손을 스쳐가는 것만으로도 큰 인연이다.
제가 좋아하는 책들은 인스타에 주기적으로 올리니, 혹시 궁금하신 분들은 참고해 주세요. @etebook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