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먼 훗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기도 하다. 그야말로 농사만 짓고 살고 싶다. 더 이상 컴퓨터로 일하며 눈을 혹사시키기 싫다. 흙을 만지며 자연에서 부쩍 자라는 작물들을 관찰하며 잘 키워 먹고 싶다. 농부였던 외가댁 어른들은 농사일 힘들다고 다른 편한 일을 찾으라고 하셨지만, 농사일이 아닌 다른 일들도 해보니 세상엔 결코 쉬운 일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종일 실내에서 전자파를 쬐는 것보다 태양 아래서 뜨거운 기운을 받으며 덥게 일하는 것도 꽤 좋아한다. 어쩌면 농부였던 외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건지도 모른다.
시골에는 빈 땅이 생기면 내 땅이 아니더라도 놀고 있는 땅에 뭐라도 심어놓는 일을 비일비재하게 볼 수 있다. 동네 어르신들이 마을 군데군데 심어놓은 작물들은 한정 없이 쑥쑥 자랐다. 매년 수확기가 되면, 동네 어른들은 넘치는 작물을 어쩌지 못해 나눠주곤 한다. 작년엔 고구마 농사가 잘 되어 이삭 줍기는 우리에게 넘겨주시길래 홀랑 주워 강아지들과 나눠 먹기도 했다. 보다 보니 욕심이 났다. 시골에서 사계절을 보낸 후에 맞은 첫 봄에, 장날을 맞추어 모종을 사러 나갔다. 내가 만든 사무실 앞마당 작은 텃밭에 고구마도, 상추도, 토마토도 심었다. 고구마는 흙에 제대로 묻지 않아 망했고, 상추는 비가 오길래 며칠 방치했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내 허리만큼 치솟아 꽃이 펴 버렸고, 토마토는 우리집 강아지 도도가, 자라기가 무섭게 똑똑 따 먹어버려서 망했다. 그리고 내가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마당에 있는 내 텃밭은 개들의 오줌받이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내 새끼들 것이라고는 하지만, 영작물의 빠른 성장을 위해 비료를 뿌리는 것과는 별개로 결국 나는 내 밭에서 난 것들 중 아무것도 건져 먹질 못했다. 상추 몇 잎 조차 따 먹지 못하고 몽땅 망해 버렸으니 직원들이 얼마나 놀렸는지 모른다. 외할아버지의 피는 물려받았지만 기술은 물려받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올해 봄이 되자 또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이랑을 만들고, 고춧대를 세우거나, 황갈빛의 논밭들에 하나둘 초록빛이 얼굴을 드밀면 왠지 나만 가만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조바심이 들곤 한다. 남들 신경 쓰며 경쟁심리를 유발시키는 것은 도시에만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이번엔 큰 맘을 먹고 나무를 심어 보기로 했다. 사실 내가 진짜 해보고 싶은 사업은, 농사보단 수목업에 가깝다. 이래 봬도 나는-물론 죽인 것이 절반쯤 되지만, 그 와중에 살아남은 내 화분들을 베란다에서 꽤 잘 키워온 편이다. 나와 줄곧 잘 살고 있는 목 베고니아는 10년째 함께 이사 다니며 살고 있다. 나의 나무 키우는 능력에 자신감이 생겨 식테크를 해볼까 진지하게 고민도 해 보았을 정도다. 시골 왔는데 쩨쩨하게 베란다에서만 줄곧 나무를 키울 수는 없지. 식목일이 되자 나도 나무 한 그루쯤 심어보고 싶어졌다.
우리 동네는 복숭아가 유명하다. 동네 뒷동산에 큰 복숭아 밭들이 있는데 개들과 산책하며 길거리에 떨어진 낙과들을 농장 사장님의 동의를 구해 주워 얻어먹은 지 3년 째다. 올해는 과일 값도 꽤 비쌌는데, 복숭아를 사 먹어본 적이 없다. 주워 온 낙과는 먹는 것 반, 버리는 것 반이지만 얼마나 달고 말랑말랑한 지 모른다. 비싼 복숭아로 주스를 만들어 먹는 건 부잣집 사모님이나 할 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넘치는 낙과로 복숭아 주스를 만드는 플렉스를 다 해본다. 그런데 말이다. 나도 저런 복숭아나무를 한 그루만 가질 수 있다면. 딱 한 그루만 있다면 여름 내내 얼마나 많은 복숭아를 먹을 수 있을까? 내 계획을 말했을 때 사무실 사람들은 만류했다. 어차피 다 죽일 것 괜히 서로 고생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원래 말리면 더 하고 싶은 법이라, 나는 기어이 인터넷으로 묘목을 시키고 삽자루를 들었다. 사무실 바로 앞 공간을 관리해야겠다고 마음만 먹기 3년째였다. 봄이면 무성한 잡초가 올라오고 개들이 화장실로 쓰면서 우리 사무실은, 비밀의 화원의 입구처럼 어마어마한 수풀로 뒤덮이곤 한다. 여름이면 제초하는 데에 진을 다 빼야 했다. 죽여도 죽여도 잡초는 질리게 잘 커졌다. 나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불편했다. 아니, 시골에 왔으면 내 집 앞을 예쁘게 잘 가꿔야지, 이게 뭐람. 팔에 토시를 끼고 장화를 신고 삽자루를 들고 땅을 팠다.
처음엔 복숭아 한 그루가 심고 싶었다. 그런데 복숭아의 종류가 꽤 많은 것을 묘목을 고르며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황도도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한 번 먹어봐야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고, 복숭아 종마다 열매 맺는 시기가 다르다고 하니, 백도도 한 그루 껴 있으면 좋겠고. 아니, 보다 보니 벚나무 묘목도 비싸지 않네? 지금은 작대기 같이 생긴 묘목일 뿐이지만 나무가 크면 봄마다 우리 집 앞마당에 벚꽃이 예쁘게 드리우겠지. 어라, 수국도 있네, 이건 올여름부터 바로 피는 거잖아? 하며 장바구니에 이것저것들을 가득 담게 되었다.
그렇게 묘목 여덟 그루를 쌓아두고 잡초를 뽑고 땅을 고르는 나를 보며 동네 어르신들이 하나 둘 다가오셨다. 과수원 사장님과, 동네 큰 손인 대장 할아버지도 오셔서 함께 땅 파고 물 붓는 것을 도와주셨다. 동영상에서 배운 것과는 달랐다. 마을 어르신들은 다년간의 연차에서 나오는 짬으로, “땅은 이만큼 더 파”, “묘목은 여기까지 묻어야 해” “물 더 가져와서 부어. 그다음 발로 꽉꽉 밟아 줘”하시며 척척 진행시켰다. 나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지나가던 할머니들도 보면서 한 마디씩 거들었다.
“과수원 만들게?”
“아뇨, 집 앞 좀 정리하려고요. 근데 죽을까 봐 겁나요.”
“안 죽어. 나무는 심어놓으면 알아서 잘 커.”
자신감이 생겼다. 동네 대장님들이 직접 행차하셔서 손을 봐주시고, 할머니들이 파이팅을 주셨지 않은가. 나는 과일이 열리면 식구들과 친구들에게 택배로 보내 줄 요량으로 박스와 완충재부터 검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무는 죽지 않는다’고 하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결국은 반년도 지나지 않아 여덟 그루의 나무가 몽땅 다 죽어버렸다. 내가 지방 한 달 살기 한다고 이 동네 저 동네 잠시 넋 놓고 돌아다니는 사이에 우리 사무실 앞은 잡초들이 또 울창한 수풀림을 조성하며 장악해 버렸다. 내 나무들을 살려 보려 제초를 해주러 들어갔는데 뱀이 거기다 집을 지었는지 색색의 실뱀들이 기어 나오길래 졸도할 것처럼 고함을 내지르며 튀어나왔다. 아마 우리 사무실 앞 공터는 다시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고 잡초들이 갈색으로 변해 죽어야 한번 더 뒤집을 수 있을 듯하다.
요즘은 지식을 얻기가 참 쉽다. 컴퓨터 서칭 한 번에 역사는 물론 과학, 수학, 부동산 모든 연혁과 공식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느 계절에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심으면 잘 크는가와 같은 농사의 노하우란 유튜브로도 잘 전달되지 않고 쉽게 배우기도 어렵다. 실제 해보지 않으면 이해하기도 힘들뿐더러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같은 결과가 나오기도 어렵다. 책이나 스마트폰으로 얻은 지식과, 몸으로, 경험으로 배우는 지식의 결은 다르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많이 하지 말라는 거였군. 이렇게 팔 걷어붙이고 하는 경험이야말로 쉽게 얻을 수 없는 것 아니잖는가.
언젠가 여름에 음성군 맹동면의 수박밭을 지날 때였다. 음성의 맹동수박은 달고 크기로 꽤 유명하다. (깨알 지역 홍보 한 번 하겠습니다) 마침 나와 같이 있었던 지인이, 맹동면 토박이었는데, 농부도 아니면서 ‘음, 수박밭에 이제 수박을 심네? 이건 추석 때 즈음 재배 하겠네.’라고 무심결에 말했다. 사실 수박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고 수박을 심는 것이야말로 나의 농사 로망의 끝판왕이다. 나의 마음은 경외로움으로 가득 찼다. 이것이야 말로 몸으로 체득한 진한 지식이 아닌가.
괜찮다. 나는 농사 한 번, 나무 한 번 밖에 안 망했으니 내년에 또 다른 거 해보면 된다. 이럴 때야 말로 부모님이 농사를 잘해서 나에게 좀 가르쳐 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걸 흙수저라 일컬어야 하는가, 진짜 흙으로 만드는 것을 전수해 줄 수 있는 부모님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