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DNA 속에는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경상도인의 피가 아주 짙게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 아빠, 우리 할머니만 봐도 몹시 급한데, 나는 숨 넘어가는 어른들 박자에 못 맞춰서 우왕좌왕하다 욕먹지 않고, 눈치 빠르고 재간 있게,
“야야, 니 거 가서 거거 좀 해라”
하면 딱 알아듣고 착착 알아서 하였다. 다람쥐만큼 날쌔고 빠른 나를 보고 어른들은 번갯불이라고 불렀다.
일 할 때도 파박박박 할 거 하고 버릴 거 버리고, 글 쓸 때도 타닥닥닥 쓸 거 쓰고 못 쓸 거 버리고. 장점이자 단점이지만, 나는 기왕 이렇게 살 거면 남한테 피해 주지 말고 최대한 특기를 장점으로 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나와 손발 맞춰 오래 일하는 사람들도 다 손발이 빠르다. 사람이 끼리끼리 모이게 된다고, 결국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일하게 되는 모양이다. 우리는 가끔 덜렁거려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에이, 잘못 됐잖아, 다시 하자.”
하고선 또 뚝딱뚝딱 보수공사를 하는 편이다. 물론 큰일이 있을 때는 더 신중하고 더 꼼꼼히 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내가 충청북도에 이사를 왔다. 그전에 나는 나의 이 급한 성격이 지리적 요인이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성향 자체가 좀 급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렇게 조그만 우리나라에, 교통이 발달 돼도 진작 발달되었고 전 국민이 하나 되어 섞인 지가 언젠데, 무슨 지역적인 특징이 유별나게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충북에 발 딛는 순간부터 여러모로 이곳은 심상찮다는 지역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사 간 직후, 처음으로 음성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터미널이 아닌, 간이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출발 시간이 되었는데도 버스가 오지 않는 것이다. 그날의 막차였는데 뭐가 잘못된 거 아닐까? 물어볼 매표소도 없고, 불안했던 나는 1분, 2분, 3분이 지날 때마다 앉았다 섰다 반복하며 혼자 화닥화닥 거리고 있었다. 이제껏 버스나 기차의 출발시간을 놓쳐 발바닥에 불나도록 달렸던 게 한두 번이었던가. 기차는 물론이고, 시내버스마저도 도착 시간을 칼같이 지켜 내가 5초만 늦어도 매정하게 떠나버리기 일쑤였다. 집에 가는 시외버스가 5분이 넘도록 오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앉아있던 고등학생들이 말한다.
“오늘 버스가 좀 늦네”
“퇴근 시간엔 원래 좀 늦제”
그녀들의 눈에는 나만 이상한 사람이었을까? 8분 여가 지난 후 다행히 버스가 와 주었고, 시내버스 아저씨도 시간 못 맞추면 밟는데, 너무 여유 있게 버스 문을 닫고 손님이 제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 한 템포 쉬고 액셀을 밟기 시작하는 거다. 그래, 우리 동네까지 직통으로 가는 버스가 있는 게 어디냐. 일단 나는 버스를 탔다는 안도감에 불안했던 마음을 금세 잊었다. 그런데 이것이 한 번만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네의 시외버스는 더 골 때린다. 우리 동네는 고속버스는 당연히 없고 시외버스만 다니는데, 인터넷으로 예매를 할 수가 없고 오로지 현장발권만 하게 되어있다.
그마저도 가끔 버스 시간이 예고 없이 없어질 때가 있는데, 새벽 6시 차를 예매했다가 차가 없어져서 6시 30분에 출발한 적이 있다. 나와 함께 서울행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몇 명 있었는데, 30분 늦게 출발한다고 하자 다들 기사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그러냐며 보던 휴대폰이나 계속해서 들여다보았다. 황당한 표정을 지은 건 나뿐이었고, 나만 혼자 벙찐 것이다.
“그럼 티켓을 6:30 걸로 바꿔야 하나요?”
“아녀, 그냥 타면 돼유~”
그래. 서울까지 나갈 수 있는 게 어디냐. 하루 더 참아본다.
세탁소에 맡겨 놓은 내 옷은, 일이 있어 일찍 문 닫은 세탁소 할머니 때문에 제때 찾지 못했다. 다음 날 급하게 입어야 하는 건데 못 입었다고 웃으며 이야기했더니 세탁소 할머니는 나를 타박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그~ 그럼 진작 맡기지 그랬어.”
그... 그러게. 나는 왜 진작 맡기지 않았던 걸까.
처음 충청도 여행을 했을 적 나를 웃게 했던 경찰서의 속도제한 현수막이 생각난다.
“그렇게 바쁘면 어제 오지 그랬슈”
한 번은 방통대 시험을 치러 충주 교육장까지 갔다. 처음으로 태블릿 시험 방식이 도입되었고, 그래서인지 시스템이 매우 불안정했다. 급기야 당일 시험 진행이 불가능하니, 2주 후에 다시 오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시험을 위해서 회사에서 중요한 일도 미루고,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직전 3일 동안 벼락치기 공부를 하고 왔는데 말이다! 내 동공에는 이글이글 불이 나고 있었다. 어떻게 책임 질 거냐며 한 마디 톡 쏘고 싶던 참이었다. 그런데 주섬주섬 자리를 뜨던 충북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괜찮아유~”
“다음에 보면 되쥬~”
그리고 난감해하는 시험감독관이 미안해할까 봐 오히려 위로를 해주고 가는 것이다.
나만 이상한 건가? 또 내가 잘못한 거야? 화가 풀리지 않아서 씩씩거리며 ‘여기가 중국이여 한국이여’하며 운전대를 잡고 집에 오는데, 어쩜 도로에 차 한 대가 없고, 가도 가도 푸릇푸릇한 나무들과 논밭 풍경에 화가 났던 마음이 스르르 누그러지는 것이었다. 아. 이건가? 이런 환경 속에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토록 여유 있을 수 있는 건가? 나는 욱했다가도 금세 가라앉고 지난 걸 되새기는 편도 아니라, 이런 사람들의 분위기 속에 살다 보니 어느 순간 그들과 동화가 되어 한 해 한 해 그들처럼 느긋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또 살다 보니 이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고.
이런 사람들의 여유 있는 태도에 가장 득을 본 것은 운전할 때이다. 그렇게 성질이 급한 나도 운전을 할 때만은 느림보가 되는데, 어쩐지 운전 경력 10년이 되어도 여전히 운전은 너무 무섭다. 그래서 운전할 때도 슬렁슬렁 천천히 천천히 가는 사람들이 놀랍지만 편하고 좋다. 처음엔 땅이 넓고 공간이 많아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이 동네에 정착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무렵 이상한 것을 느꼈다. 자동차 경적소리가 단 한 번도 울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사무실 앞은 차가 쌩쌩 달리는 4차선의 대로가 있고, 내가 사는 집 주변은 6차선 사거리가 있는데도 역시 그랬다. 그럴 수도 있지. 급한 것 없고 도로가 넓으니까. 그런데 운전을 하며 분명 도시였으면 빵빵거리고 난리가 났을 상황에도 사람들은 조용했다. 가령, 신호가 바뀌었는데 앞차가 움직이지 않으면? 상식적으로 빵, 하고 한 번쯤은 일깨워줘야 하지 않나? 경적을 울리는 사람은 서너 번째 줄에 서 있던 나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등 가장 첫 번째에 줄을 서게 된 내가 빨간불에 걸린 사이 잠시 음악을 바꾸느라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신호가 바뀌었던 듯하다. 나는 화들짝 놀라 급하게 ‘부앙~’하고 액셀을 밟고 가는데, 그제야 뒤에서 차들이 느릿느릿 하나씩 따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 이러고 말겠지 했는데 이것이 이 동네 분위기였던지, 지금까지도 도로에서 머뭇거리는 차에게 빵빵대는 광경을 거의 본 적이 많고, 더 이상 나도 뒤에 서서 재촉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빵 하는 소리를 들으면, ‘도시 사람인가? 우리 동네 사람들은 저러지 않는데.’ 하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신호체계는 동네 사람들이 만드는 것인지, 비보호가 아니라도 신호대로 가지 않는 애매한 곳이 있다. 그러면 슬그머니 알아서 눈치를 봐주는 것이 또 이 동네 운전의 미덕인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대체적으로 신호 앞에 긴 줄이 늘어서 있지 않고, 이번 신호에 못 가면 다음 신호가 금방 바뀌며 교통체증이 거의 없는 동네라 그런가보다.
얼마 전에는 회사 선배가 운전하는 차를 시내에서 우연히 만나 뒤따라가게 되었는데 하이빔으로 인사를 했더니 선배가 백미러를 보며 속으로,
“어떤 새끼가 충북에서 쌍라이트를 켜고 지랄이야”
하고 욕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경상도에 가면 놀란다고 한다. 퉁명스러운 식당 아주머니, 화가 난 듯한 버스 기사님. 하지만 어릴 적부터 그걸 봐 온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진짜 화가 난 게 아니라 그것이 성향이니까. 되려 그런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면 훨씬 더 정이 많은 경우도 많다.
충청도에 와서는 식당을 가거나 편의점에 가서 단 한 번도 그런 까칠함을 느껴 보거나, 기분이 나빠 본 경험이 없다. 그것은 이곳에서 받은 또 하나의 충격적이었다. 서울에서도 종종 외식하러 갔다가 그날따라 사장님이나 알바의 일진이 좋지 않았던 건지 부당하게 불친절했던 경험이 여럿 있었다. 몇 번 당하다가 더러워서 집에서 해 먹는다 결심했던 적도 있는데, 어쩜 여기선 단 한 번도 무서운 사장님을 만난 적이 없으니, 맨날 맛집 찾아 돌아다니는 것은 사장님들의 친절 때문이다. 3년 정도 살았으면 주변에 미운 사람 정도 하나 생길 수도 있는데 이곳 사람들의 푸근함에는 지금도 혀를 내두른다. 충북 사람들이 양반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닌가 보다.
충북에 오래 살았던 사람들은 말한다. 이것이 충북의 힘이라고. 똑같은 세상에 똑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굳이 급하게, 사납게, 기분 나쁘게 할 필요가 있냐고. 어쩌면 힐링이나 명상을 하려면 다들 충북으로 한 번씩 와서 몇 달쯤 살아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제 나는 도시에 나가면 끼어드는 차에게 무조건 양보를 해주고, 화를 내는 사람을 만나도 그러려니 이해하고, 시간이 조금 늦어도, 일정에 오차가 있어도, ‘그럴 수 있쥬’ 하고 넘기게 된다. 시간이 금이라며, 시간을 몽땅 돈 바꿔 먹는데 쓰겠다던 어린 시절의 내가 시골에 이사 오면서 이렇게 변했다. 사람들이 시골 사는 게 뭐가 좋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여유로워서? 공기가 좋아서? 다 아니다. 그것만으로 살 수 없는 시골의 무언가가 있다. 이런 사람들의 분위기와 삶의 리듬 때문인지, 당분간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 전혀 없다.
여러분, 충북 살러 오세요. 충북 진짜 살 만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