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밀인의 영화 노트
25.03.10
녹색광선 (The Green Ray)
에릭 로메르 감독/ 1990/ 프랑스
제목마저 녹색 광선인데, 녹색 바탕에
녹색 이야기를 정말 계속할 줄은 이때는 몰랐다.
기대하던 바캉스가 취소된 델핀.
주인공인 줄도 모르고 그냥 옆 서브 캐릭터인 줄 알았다.
외모만 봤을 땐 정말 발랄하고 귀여운 캐릭터일 줄
베이지 + 핑크들이 포인트.
올여름엔 더운 나라에 가보고 싶어.
햇볕을 쬐고 싶달까
난 모험은 별로라서.
-그냥 잠시 즐겨 이번엔 도전해 보는 거야
모험이 별로인 주인공. ㅋㅋㅋ
싫어하는 게 아주 명확하다.
아무리 바캉스가 취소되었다지만,
항상 어딘가를 두리번대며 관찰하고 우울해 보인다.
단체여행을 가 봐
-미쳤구나
왜? 편견이 있네 단체여행이 뭐 어때서?
-그만 좀 공격해
공격이 아니라 외로움에서 벗어나라고. 계속 이러면 안 돼
평생 혼자 살 순 없잖아. 네가 얼마나 슬퍼 보이는데
델핀이 겪는 외로움, 그리고 타인을 '위한다'는 말이 오히려 상처로 다가오는 순간들, 그 미묘한 충돌.
누군가를 위한다는 말이
어떤 이에게는 날카로운 공격처럼 느껴질 수 있다.
녹색광선 속 이 장면은 그 지점을 아주 섬세하게 건드린다.
델핀은 작은 말 한마디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그건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더 예민해진 사람의 반응이다.
외로움은 말없이 깊어지고 그걸 건드리는 말들은 선의라 해도 쉽게 상처로 이어진다.
이 영화는 그런 순간들을 낯설 만큼 길게 붙잡는다.
그래서 델핀의 불편함이 결국, 나의 것처럼 느껴졌다.
나 또한 비슷한 면이 있는 만큼 더 깊이 공감이 되었다.
네가 날 몰라서 그래. 가끔 5분 정도 보면서 어떻게 알아?
나도 생각이 많지만 다 표현하진 않아.
-표현해 봐! 네가 다 말했으면 좋겠어
감정을 억누르고, 침묵을 선택한 사람이, 계속해서 말을 요구받을 때 느끼는 고립감.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추억에 빠져 사는 거야
내가 아니라 내 인생이 고집이 센 거야
산을 다녀온 후, 또다시 허무함이 밀려온다.
한동안은 바람과 풍경이 모든 것을 씻어주는 것 같았지만, 잠시뿐이었다.
정말 바보 같아.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소외된 느낌이야.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압박, 행복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그리고 정작 자신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서 있는 감각.
자연 속에서도, 사람들 틈에서도 어딘가 계속 겉도는 감정.
녹색 광선은 이 막막한 마음의 결을 정확하게 잡아낸다.
찾아다니지 않으면 네 마음을 어떻게 알아?
-나도 관찰은 해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그 이후가 애매해서 그렇지.
난 적극적인 사람이 아니거든. 그냥 관찰할 뿐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다가오지 않아.
"난 사람들한테 늘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귀를 기울여"
그 말에 돌아오는 건,
"사람을 바로 믿지 못하는구나, 난 사람을 믿는 게 아니고 즐기는 편이야.
잘 맞는 괜찮은 사람을 찾으려면 절대 내 감정을 바로 드러내선 안 돼."라는 조언이다.
카드게임을 하듯이 내 패를 감추는 것이다.
상대의 반응을 살피고, 좋고 나쁜지 결정을 하는 것.
하지만 델핀은 말한다.
"내 패는 아무것도 없어. 네가 패를 감춰야 한다는데 난 아무것도 없거든.
나한테 그런 게 있었대도 사람들이 금방 알아챘을 거야"
"사람들이 뭘 어쩐다고"
이 장면은 감정을 '운영'하는 사람과
그저 진심을 보여주는 사람 사이의 간극을 보여준다.
델핀은 전략적으로 관계를 만들지 못한다.
그저 마음을 열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유심히 관찰하고 반응하려 애쓴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 건
'내가 그럴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 믿어버린다.
"나도 노력해. 들으려고도 하고 대화도 한다고. 난 마음을 연다고.
유심히 듣고 상황을 관찰해. 누군가 내게 다가오지 않는 건 그럴 가치가 없어서야."
마음을 조절할 줄 몰라 더 조용하고, 스스로 더 깊은 고립으로 들어가 버리는 사람.
에릭 로메르의 영화에서만 가능한, 일상적이면서도 깊은 내용이다.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관찰이라는 명목하에 이것저것 피해 다니며 원하는 것만 하면서도
불만과 걱정은 많고, 그럼에도 자신이 지키고 싶은 소신은 분명히 갖고 있는 사람.
결국엔 원하는 대로 하는 사람.
델핀을 보며 자꾸만 나 자신이 겹쳐졌다.
어쩌면 이것이 허무할 때도, 너무 예민한 마음이 나를 힘들게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엔
그래도 괜찮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맞을 거라고 감독은 위로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보는 내내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마지막에는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
자신의 예민함에 집중하고, 솔직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을 보며 이대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엔, 낭만과 희망으로 끝까지 자신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던 사람.
그런 순수함이 무너지지 않기를,
아주 복잡하지만 꽤나 조용히 위로받게 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