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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엉군 Jul 18. 2018

나침반을 잃은 인도주의자

#2 가끔은 옛날 이야기를

H 에게



요즘은 어때? 그래도 얼마전에 통화했을 때 네 목소리는 꽤 괜찮았는데. 사업도 가정도 새로운 궤도에 오른 것 같아 좋았어.


하지만 내겐 늘 미안한 마음이 더 커. 네가 몇 번이나 깊은 터널 속에서 생의 고비를 넘나들 때, 함께 있어주지 못한게 늘 걸려. 그래서 오늘은 나의 터널 속에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멋진 추억들이 많지만 요즘 난 우리가 함께 The Economist를 읽었던 시간들이 자주 생각나. 그 때는 우리의 일을 업계의 시각에 가두지 않고 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지. 우리 일의 방향과 가치를 가늠할 수 있었고, 가능성으로 가득한 신세계들을 훔쳐볼 수도 있었어. 조금은 허세도 있었지만 진짜 멋진 나침반이었어. ㅎ



지금의 나는 미로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아. UN은 지금 세계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인도적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사실 한국에서는 실감하기 어렵잖아?


시리아도, 남수단도, 중앙아프리카도 모두 먼 곳이니까. 그나마 그 먼 예멘에서 어렵게 손님들이 찾아왔으니 이제 조금은 실감할 수도 있겠지.



이 곳, 인도주의단체에서의 하루는 마치 국제부의 시간을 좀더 가늘고 길게 여러타래의 실타래들로 펼쳐놓은 것만 같아. 언론은 사망자 중심의 굵직한 사건사고를 보도하면 되지만, 이곳은 그 이후에 수년간 진행되고 있는 일들이 더 중요해.


그 곳이 어디이건 생존자들이 그들의 삶의 중심을 회복하는 데엔 정말 긴 시간이 필요하거든. 난민의 경우에는 귀향까지 평균 26년이 걸린다고 해.



물론, 분쟁지역이나 취약국가에서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으면 감동받을 때도 종종 있어. 그럼 우리의 니콜라스 크리스토퍼 형님을 소환하곤 하지.


하지만 홍수나 가뭄이라도 터지면 진짜 다 놓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회사 다닐때는 강약중간약이 있었는데, 이 곳은 강중강강 같은 느낌이랄까. 뭐 아직 초짜라 그럴테지만.



에티오피아 출장 이야기를 들려 주었을 때, 너는 재밌는 말을 했지. 죽음에 관한. 죽음으로 죽음을 이야기 하지 말고, 죽음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법에 대해서.


처음엔 어리둥절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조금 더 이해가 되더라구. 아전인수하면 절망으로 절망을 이야기 하지 말고, 절망으로 희망을 소환하라는 거지? ㅎ



그렇다면 그런 '인간적인 가치'는 새로운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을까? 예전에는 나는 스스로 꽤나 낙천주의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곳에서의 시간이 쌓이니 비관주의자까지는 아니라더라도 최소 현실주의자는 되는 것 같아.


절대적인 가치도, 기준도, 이상도 없다는 것을 점점 받아들이게 되거든. 그래서 <붉은 돼지>의 포르코의 마음이 절실히 와닿는 요즘이야. 그는 왜 인간이기를 거부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야할 자세란 무엇일까.  



말이 길었네. 친구라는 단어가 낯설어져 버린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가장 먼 곳의 인간을 향해 날아가는 마음으로 내 가장 오랜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먼 어제의 웃음이 먼 내일의 웃음이 될 수 있기를. 무엇보다 건강하기를!





늘 찾아가던 옛 친구의 단골가게
마로니에를 창가에서 내다보며
커피 한 잔으로 하루
보이지 않는 내일을 향해
다들 희망을 품었었지
흔들리던 시대의 뜨거운 바람에 떠밀려
온몸으로 순간을 느꼈지

그랬었지


- "가끔은 옛날이야기를" 중, 붉은돼지 OST


바다와 하늘, 양쪽이 비행사의 마음을 씻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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