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엉군 Aug 22. 2018

번역 활동의 묘미

#5. 커뮤니케이션 활동가의 한 모퉁이를 돌며

M 에게



태국의 온도와 습도는 이제 적응됐나요? 한국에도 마침내 여름의 끝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새벽녘의 공기는 창문을 활짝 열어놓기에는 스산함마저 느껴질 정도네요. 구름도 층층이 다른 형태와 속도로 흐르고 있구요. 돌아보니 작년 이 즈음에 처음 만났었네요. 둘다 정장 입고 ㅎㅎ


먼저 사과를 해야할 거 같아요. 그대가 진심을 담아 모두에게 선물해준 드립 서버를,  제가 그만 깨트리고 말았어요. 정수기 물을 비운다고 일어서다가 그만. 그래서 혹시나 무슨 일이 있는건 아닌가 괜시리 마음이 쓰였는데, 그 참에 마침 나누고 싶었던 생각을 정리해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요런 느낌이었는데. 지송  ㅠㅠ


최근 분쟁보고서를 번역했어요. 본부에서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보고서였는데, 저는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죠. 그런데 뒷자리 인턴 동료가 보고서가 재미있다고 의미있다고 추천을 해서 가볍게 읽는다는 것이 그만... 어느덧 두 달간 발을 담그고 있네요. 알죠? 이 세계. ^^


가장 먼저 제 눈을 뜨이게 했던 건 난민보다 국내실향민이 두 배 많다는 통계였어요. 그러면서 관심받지 못하는 장기간 방치된 이주 위기들로 이야기가 전개되죠.


첫 번째 숲에서 가족과 함께 25번이나 이주해야 했던 시리아 국내실향민 여성을 만나요. 두 번째 숲에서는 세대를 걸쳐 추방 중인 방글라데시의 로힝야족 난민들을 만나죠. 그리고 마지막 숲에서는 내전 중인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 나와요. 분쟁을 피해 떠나온 사람들의 교차로가 된 한 마을과 조금은 안전해졌지만 귀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다른 마을에 대한 이야기죠.


@중앙아프리카공화국, by Chris de Bode, Panos Pictures


40페이지 가까운 번역을 하면서 정말 많은 공부가 되었어요. 난민, 국내실향민, 이주, 귀향, 통합... 마치 양파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가며 그 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들어가는 듯한. 사무실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현장의 목소리를 며칠 밤낮으로 듣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그리고는 어떻게든 이를 좀더 많은 동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신기했어요.


그래서 두 달이 되어버린거에요. 조금이라도 더 쉽고 간결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글을 다듬고, 각주를 챙기고, 디자인을 고민하다보니 결국 그리된거죠. 그러면서 자연스레 우리가 세계기아지수를 출간하던 그 시간들이 오버랩 되었답니다.


8월 중순, 작년 이 맘때 서울


최근 '단테 신곡 강의'(2004, 안티쿠스)라는 책을 읽었는데, 저자인 이마마치 선생이 키케로의 일화를 말해주는 대목이 있어요. 키케로가 그리스 서사시와 비극에 관심을 가지고 그에 빠져들면서 더 많은 로마인이 이를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리스어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운동'을 펼쳤다고 해요. 그 대목에서 저도 모르게 2000년을 뛰어넘는 어떤 공명을 느꼈죠.


어쩌면 연초부터 목표를 세우고 달렸던 프로젝트라면 이렇게 크게 와닿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해야하는 업무 중 하나였으니까요. 그런데 커뮤니케이션팀 내에서 자발적으로 보고서를 평가하고, 자체 번역을 결정하고, 이를 단체를 알리는 과정에서 묘한 '활동력'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번역의 결과는 알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좀더 국내실향민들의 마음을, 이 세계의 진심을 엿보게 되어서 기쁩니다. 드립 서버는 깨먹었지만, 편지를 쓸 수 있어서 기쁘구요. 건강해요. 또 편지할께요.





작가의 이전글 지속가능성이라는 마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