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게만 자라주렴
세상의 끝에서 가장 많이 만난 마음은 '엄마의 마음'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수많은 같은 마음들이 그곳에 있었다. 자식의 건강을 챙기는 마음. 아이가 그저 무탈하기만을 바라는 마음.
다니엘라도 같았다. 6개월 된 막내 아이가 계속 운다. 열이 오르고 토하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방금까지도 건강했던 아이였다. 할 일도 돌볼 가족도 많은데 그녀는 온통 막내 걱정뿐이다. 마침 마을을 찾은 보건요원이 아이를 살피고 급성영양실조와 말라리아로 진단한다. 약과 치료식을 처방받는다. 아픈 이유를 알고서야 엄마는 안도한다.
아이가 자라면 엄마의 마음은 공부다 취업이다 여러갈래로 뻗어나간다. 하지만 나라의 경제발전 기준과 관계 없이 5세 미만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모두 같은 마음의 터널을 통과한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만 자라달라는 마음. 그건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단체에 첫 출근을 할 무렵, 우리집 꼬맹이도 어린이집에 처음 등원했다. 때마침 이직으로 쉬게 된 일주일간 녀석의 적응기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우리 집에선 평생 훈장 ㅎ) 유모차를 밀며 아침 언덕길을 오르던 그 날들로부터 5년, 녀석은 이제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나이까지 건강하게 자랐다.
돌아보면 아빠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시기에 육아휴직없이도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 아침에 등원시키고 출근하고, 퇴근후 이렇게 저렇게 시간을 보내며 함께 엄마를 기다렸다. 이렇게 말해도 처음엔 엄청 옹졸했다. 내 생각으로 놀이나 시간을 이끌고, 아이의 반응이 예상과 다르면 훈계도 많았다. 그러다 울면 "그럼 엄마한테 가" 소리지르며 대치 상황으로 몰아가기 다반사였다.
그런 날들 겹겹 속에서 어느날 알게 됐다. 아이가 나보다 더 온전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표현한다는 것을. 물론 (나와 다른 별에서 온) 딸아이다 보니 더 조심스럽고 존중하는 태도도 있었다. 그래서 몇 차례 깨진 후에는 내 의견을 고집하지 않는 인격으로 성숙할 수 있었다. ㅎㅎ 그 즈음, 소파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는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는 말이 내게도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다니엘라의 아이처럼 이 녀석도 5살까지 참 많이도 아팠다. 코감기랑 장염을 달고 살았다. 이유없이 간밤에 열이 40도 가까이 오르기도 했다. 아빠로서 옆에 있었지만, 돌아보면 아픈 아이를 돌보는 마음은 엄마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녀석도 아프면 항상 엄마를 찾았다.
아이가 엄마를 찾는 시간에 엄마는 자신의 길을 잘 다졌다. 운명적인 큰 소송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고, 급기야 네이버가 인정한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면서도 아이가 찾을 때는 엄마의 자리로 순간이동해야 할 줄 아는 욕심많고 정신없는 워킹맘의 5년이었다.
아버지는 지금도 손자를 원하시지만 나는 '기후 위기 = 인구 축소'라는 시대적 정신을 수용하기로 했다. 사실 마음 한켠에는 늘 장남으로써 가문을 이어야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꼬맹이가 4살 정도까지만 해도 둘째 이야기가 나오면 웃으며 여지를 남기곤 했다. 하지만 아이가 6~7살 무렵 엄마의 일을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애매한 대답은 접었다. 아내도 딸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어야겠구나 싶었다. 딸아이도 훗날 자신의 일과 가정의 갈림길에 설 날이 올테니 말이다. 그때까지 아내도 나도 모두 갈 수 있는데까지 힘껏 가보는 수 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돌아보면 정말 감사한 5년이었다. 딸 아이와 아내가 집중해야 하는 라이프 사이클에 이를 서포트해줄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할 수 있었다. 일을 통해 나는 세상의 끝에 있는 엄마들의 이야기에 공명할 수 있었고, 딸아이와 아내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고군분투하는 그녀들을 응원했고, 어리숙한 나 또한 그녀들의 격려를 받았다.
피터 드러커 형님은 비영리의 목표는 '변화'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내가 누군가를 변화시켰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시간을 통해 스스로 조금은 변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