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생활에 그럭저럭 적응하며 6개월 남짓한 시간이 지났다. 나는 바쁜 회사 일로 잠시 뒤로 미뤄뒀던 내 목표를 끄집어냈다. 대학원 입학.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낙방한 후 플랜 B가 없었기에 나는 아무런 방안을 세울 수가 없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선택한 것은 학교의 명성도 있었지만 국립대학교이기에 등록금이 저렴한 이유가 가장 컸다. 서울시내에 훌륭한 다른 사립대학교도 많았지만 내가 모아놓은 돈으로 등록금을 충당하기에는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갈 때 우연히 알게 되었던 영국문화원 장학금에 대한 생각이 났다. ‘그 장학금은 아직도 주나?’
혹시 하는 마음에 검색을 해보니 6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여전히 장학금 지급을 하고 있었다. 그 장학금은 매 년 국내에서 한 번에 3~4명을 선발하여 일 인당 천 파운드(원화로 약 2천만 원, 2008년 기준)의 장학금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학금 대상자 선발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일단 지원을 하기로 결심했다. 장학금에 지원하기 위한 조건은 IELTS 시험에서 6점 이상을 받아야 하고 영국 소재 대학원에 합격을 해야 했다. 가장 빠른 IELTS시험 일정에 응시해야 했는데 불과 2주 후였다.
학원을 다니기에도 빠듯한 일정이었고 급한 마음에 도서관에서 IELTS 시험 문제집을 빌려서 공부했다. TOEIC과 같은 어학시험과 달리 IELTS는 학술적인 내용의 시험이라서 문제가 쉽지 않았지만 TEPS를 공부해 둔 것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첫 번째 시험에서 필요한 점수 6점을 얻었다. 그리고 영국 대학원에 입학 신청서를 제출했다.
입학 신청서는 유학원 같은 곳에서 돈을 받고 써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곳에 돈을 들이고 싶지도 않았고 어차피 대학원에서 공부할 사람인 내가 내 실력으로 작성해서 합격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내가 운영했던 시사영어모임과 회사에서의 영어 사용이 도움이 되었던 것일까? 나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제출한 입학 신청서로 당당히 영국 대학원에서 입학 허가서를 받았다. 이제 비로소 영국문화원의 장학금에 신청할 자격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나는 장학금 신청 일정에 늦지 않게 서류를 준비해서 제출했다. 이제 장학금 면접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원 준비를 주경야독으로 했기에 회사일에도 충실했다. 한 동안 업무에서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아서 매일 일상적인 업무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는 다면 회사일이 아니다.
어느 날 우리 회사의 물류창고에서 근무하시는 대리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세관에서 다녀갔는데 일본에서 수입한 신발의 원산지가 중국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으니 서류를 찾아서 원산지를 증명해 내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 회사는 일본에서 구두와 운동화 액세서리 등을 수입하여 국내에 유통하는 사업도 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 이것이 정확히 어떤 문제인지 쉽게 감이 오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내 모습을 보고 옆에서 같이 일하는 중화권 담당 대리가 이것은 원산지 표기 위반으로 서류를 증거로 제출하여 소명하지 않으면 회사가 큰 벌금을 낼 수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수출과 수입 등 무역업무에 있어서 나보다 경력이 훨씬 많은 베테랑직원이었다.
중화권 담당 대리는 해당 물품의 수입신고필증을 찾아서 원산지가 원래 일본이 맞는데 창고에서 일하는 직원의 실수로 중국으로 잘못 붙여진 것이라고 소명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수입신고필증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물품이 수입된 것은 자그마치 내가 입사하기 3년 전이라는 것이다. 내가 입사했을 때부터 알아차린 문제가 드디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입사 후부터 나와 우리 부서 직원들의 손을 거친 모든 무역 서류를 업무 파일에 날짜별, 품목별로 철저하게 서류철 해서 관리했고 그렇게 하도록 지시했다. 육류수입회사에서 일할 때 무역서류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기존에 흩어져있던 관리되지 않던 서류를 최대한 정리해서 관리했다. 그런데 해당 물품의 수입신고필증은 없는 것이다. 나는 찾고 찾고 또 찾았다. 그런데 없었다. 분실된 것이었다.
우리 회사와 거래하는 포워딩 회사(무역을 하는 회사의 화물 운송을 주선해 주는 회사)와 관세사 사무실에도 사정을 얘기하고 해당 서류가 있는지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두 곳 모두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고 열심히 찾아주었지만 서류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해당 물품이 아닌 같은 일본 회사에서 비슷한 시기에 수입한 유사한 다른 물품의 수입신고필증으로 소명하기로 했다.
이 서류를 들고 직접 서울세관의 담당자를 만나야 했다. 나는 해외 바이어들은 처음 만나도 친근한 척 잘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매우 공식적이고 중대한 사안으로 이런 기관을 방문을 할 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무척 난감하고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도 서울세관에 갈 때 국내영업부 부장님께서 나와 동행해 주시기로 하셨다. 국내영업부 부장님께서 드디어 우리 해외기획부에 도움을 주실 수 있는 일이 생긴 것이다.
서울세관에 부장님과 함께 도착했을 때부터 나는 부장님의 존재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30대 초반의 담당자 한 명이 소명하러 온 것과 50대의 베테랑 경력의 부장님과 함께 온 것은 분위기부터 달랐다. 서울세관의 담당자는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었고 역시나 한국 사회에서 나이는 중요했던 것 같다. 세관의 담당자는 부장님을 공손하고 예의 있게 대하셨다.
나는 속으로 '내가 혼자 왔어도 이렇게 격식을 갖추셨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부장님의 언변은 뛰어났다. 서류에 대한 설명은 아주 잠깐이었고 우리 회사의 창립 배경부터, 업무 방식과 직원의 수, 업무 하면서 있었던 힘들었던 일 등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시면서 앞으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사죄까지, 동정심을 유발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말씀하셨다. 오랫동안 영업을 하시면서 쌓아오신 내공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부장님에 대한 존경심이 조금 생겼고 배울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서울세관은 우리 회사에 원산지 표기 위반으로 벌금을 부과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원산지 표기에 더 세심하게 신경 쓰고 서류 관리를 더 철저하게 하라는 권고만 들었을 뿐이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서울세관은 애초부터 우리 회사에 벌금을 부과할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원산지 표기 단속 중 위반건이 발견되어 서류를 요구했으나 우리 회사의 위반건은 중대한 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보통 원산지 표기를 위반하려고 계획했다면 중국산을 일본산으로 속이지 일본산을 구태여 중국산으로 속이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더구나 우리 회사가 일본에서 수입하여 국내에 유통하는 물량은 많은 양도 아니었다. 원산지 표기 위반으로 세관을 방문하는 일이 처음에는 회사에 큰 타격을 주는 겁이 나고 중대한 일로 여겨졌지만 다행히 해프닝으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