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가지 생각과 나의 행동(2022.7.6)

하루를 살기 위한 용기

by 소국

늘 박물관을 다녀오면 혼자 오늘을 되뇌인다. 분명히 웃었는데 뭔가 씁쓸하다. 이놈의 말이 문제인건가. 괜히 말을 했나 싶을 정도로 나의 경계가 풀리고 술술 얘기했나 싶다. 나의 말이 나는 옳다고 여겨서 지껄이지만 결국 되돌아보면 내 중심적인 생각만 가득하게 여겨진다.


옆자리 선생님이 우체국에 데려다준다고 차를 태워주셨다. 고마워서 커피한잔 사드리려고 했다. 카페로 들어가서 뭘 부치는거냐 얘기가 나와서 집 문제를 얘기했다. 내게 넘어올수 있는 빚이 있고 이걸 처리해야한다. 아빠 빚이 내게 넘어오지 않게 대출을 막으려고 부동산을 내놓았다. 최악의 결과는 모든 부동산이 경매로 넘어가는건데, 일단 빚을 막는게 목표다 라고 얘기했던것 같다.


그런데 다 말하고 나니, 내가 너무 부자같이 보일까 걱정이었다. 난 부자가 아닌데. 참 별걱정을 다한다.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가 그렇게 중요한가 싶을정도로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다. 곤한건지 뭔지. 어쩐지 이런 사적인 얘기들도 다 가십거리에 불과하게 될거란 생각에 아차 싶고 섬뜩했다. 남 얘기가 쉬운 직장생활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껴서 그런지도 모른다.


사무실에 들어와서 업무를 보는데 매일 느끼는거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면 업무도 되질 않는다. 말이 통한다는건 열린 마음이어야 뭔가 소통이 된다는것이다. 바쁜 사무실에서 빠른 업무처리를 원하지만 늘 답답하게 업무처리가 되는 이유는 뭔가 소통이 안되기 때문이다. 젊은 남자직원이 내게 이미지 제작을 원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미지 제작이 아니라 내가 중간다리 역할을 하고 업체에 말을 해달라는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분이 도대체 어떤 이미지를 원하는지 나조차도 파악이 안되서 전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분이 원하는게 뭔지 모르겠어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냥 전달하고 결과물을 보여주면 자꾸 다시 제작해달라는거다. 그래서 늘 이런식이라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서 계속 질문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종결정권은 관장님께 있으니 관장님 의견에 맞춰야한단다.


이분은 프로그램의 책임자이니 책임자의 어떤 의견도 필요할것 같은데, 참 난감했다. 나는 나대로 업무를 빨리 추진해서 결과물을 받는게 목적이라, 이해가 되지 않으니 주간 회의에 들어간 선생님들께 상황을 여쭤봤다. 관장님이 무얼 원하시는거냐고. 그랬더니 말들이 나온다. 이미지의 정확한 의도와 목적이 말이다. 그제서야 나는 이해하고 업무를 추진했다.


젊은 남자 직원하고는 무엇이 이토록 소통을 어렵게 만들었나 싶다.


이런 분이 사무실에 1명이 더 있다. 그런데 사실 이 2명에게 내 스스로가 조금 거리감이 들긴하다. 그렇다고 다른 선생님이 마냥 편한것도 아니지만, 그런 경계가 유독 다른 선생님들에 비해 심하다.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분들도 나름의 배려를 하시느라 속시원하게 말을 못하는것 같아 그냥 넘어간다.


뭐든지 속시원하게 말할 구석이 한구석이라도 있다면 나는 오늘도 살아볼 용기가 나는것 같다. 큐티 말씀을 보는데 마음이 찡하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이가 아니요. 모든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주파수를 사람에게 맞추어 깊은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말을 했던 것 같다. 조건부적이고 무언가 한계점이 있는 배려를 주고 받을때마다 늘 지치고 만다. 상대를 그런 눈으로 보고, 돌아와서 집에서 가만히 생각하길 나도 그랬구나 싶다. 결국 나는 또 말씀에 위로를 받는다. 신이라는 존재가 신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극한의 고통을 본인의 의지로 경험할만큼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의 연약함도 경험해봤다는 것에 위로를 받는다. 나님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조차도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이렇게 받아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자기 계발서 백날 보고, 스트레스 푼다고 뭐 다른 짓을 해봐도 피할수 없는 현실을 직면할때. 더 정확히는 '나'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마주할때. 저 말씀이 확 내리 꽂는다. 국 죽을까 싶어 울고, 간구하고, 소원을 올리는 인간의 한계를 신도 경험한 것이다. 죽을까 싶어..죽을까 싶어.. 그 많은 고민을 한다는게 참 부질없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 거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는 게 삶이 더 역동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만 잘 살자라는 나의 생각이 어쩌면 맞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만 잘 살자. 오늘만.

선생님들이 오셨다. 다시 이유모를 긴장감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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