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시작은 어디고, 끝은 어디인가?_23.12.1
갈등은 불편하지만, 진실을 알려준다.
기만이라는 게 뭔 말인가 했는데, 싸우면서 갈등을 일으키면서 알았다. 아, 저들은 내가 저들을 기만한다고 여기고 있구나. 그리고 나도 나 스스로를 자주 기만했구나.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느끼는 감정. 기만당했다고 느끼는 그 느낌이 맞을 수도 있다.
말조심이나 행동 조심은 겸손한 척하려고 뭔가 있어 보이려고 예의 차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상대나 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라는 사실이다.
-내가 왜 화가 났을까?-
상대가 신뢰가 되지 않아서. 이유가 명확했다. 내 감정과 생각을 오롯이 드러냈는데, 이것을 빌미 삼아 책 잡는 것 같아서 그랬다.
남편에게 들은 말들 중에 상처가 남는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단지, 가만히 생각해 봤다. 내가 왜 화가 나는지. 그랬더니 <배우자는 나에게 안전기지>여야 한다는 관념 때문에 화가 났다. 배우자가 그럴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피부로 접하고 있는 40대다.
어머님과의 싸움에서 느끼는 건 <어머님은 왜 내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기실까?> 남편도 종종 하는 말이 <당신은 나를 무시하잖아>라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같은 맥락으로 내가 이 두 사람을 감정적으로 거리 두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머님은 나에게 안전기지가 아니다><믿을 수 없다>라는 생각이 내게 자리 잡고 있었다.
결과론적으로는 이 분들 모두 가정을 위한 노력과 헌신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왜 나의 뇌는 이분들을 <신뢰하지 못하겠다>고 자꾸 되뇌고 있는 걸까? 결국 이분들이 가족을 위해 한다는 그 행위가 말은 가족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만족하는 본인 자신의 만족감이 더 컸기 때문이다. 상대는 결국 그것에 대해 감사로 여기고 불만이 없어야 하는. 이 분들은 나의 불만은 버겁고, 나의 태도는 불량하다. 나는 이 분들의 태도 중에 <본인의 만족을 밑바탕에 깔아 두고 선의를 베푸는 친절>은 불편하다.
<무시가 아니라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는 거다>라고 말하면 상처받을까 봐. 혹은 <당신은 가족을 위해 애쓰지만, 나는 안전하다 느끼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하면 상처받을까 봐. 그냥 입을 닫았다.
나의 머릿속에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계속해서 지나쳐가는 이유는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는 데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 사람만의 세계에서 선택이 이루어지기에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속에서 남편이 나에 대해 느끼는 감정선을 고스란히 느낄 기회가 있었다. 교통사고 꿈이었는데, 이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예측불가 같은 느낌이었겠구나>를 느꼈다. 일을 벌여놓고, 수습이 필요할 때 전화하는. 이 사람도 내가 쉽지 않겠구나 싶었다. 왜 이런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름 남편의 심정을 꿈에 빗대어 해석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모르겠다. 가족으로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저 살아보는 수밖에 없어서 사는데, 언젠가 아이들이 다 커서 가족 품을 떠날 쯤에 얻어가는 게 있는 가족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