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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국 Dec 14. 2023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안학교 _23.12.13

둘째도 보내기로 하고, 여전히 고민과 방황 중이다.

왜 잠이 안 오지? 이것은 사인이다. 일단 써야 마음이 진정될 것 같다.


수요기도회에 참석했다. 이것은 기도회인가 생의 고민을 나누는 자리인가. 내가 예민한가? 미친 듯이 쓰여있는 기도제목에 내가 숨이 콱 막힐 것 같았다. 선교단체를 나와보니 내 신앙이 정말 별 거 없음을 알았다. 믿음을 삶으로 증명해내지 않고서야 나는 발전이 없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막상 아이를 기독대안학교에 보내고, 3년을 보내고 나서 드는 생각은 <은혜>다.(갑자기?)


교육의 퀄리티, 교사의 전문성, 뭔가 더 나은 것들이 이 아이를 좀 더 낫게 만들지 않았다. 대안학교의 내부적인 상황은 수요기도회에서 받은 A4용지 한 면 가득 채운 기도제목처럼 산처럼 쌓인 문제들로 가득했다. 이게 말이 되나 싶은 학사일정과 학년별 수많은 행사들, 교내 학생들 간의 관계문제, 장애아동에 관한 문제, 편입생 문제, 교사 역량문제, 교사의 과부하된 업무, 학교의 재정문제, 학부모의 지나친 개입 등 너무 많다.


3년을 되돌아보고, 큰아이를 생각할 때 아이는 학교를 사랑했다. 내 학교. 내 친구들. 내 선생님. 이 아이의 머릿속은 이 학교는 거의 나의 나와바리? 쯤 된다. 그런데 과연 내 아이만 그렇게 생각하나? 아니다. 대부분 이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 왜 그럴까? 아이가 학교에 애착을 가질 수 있도록 교사며 학부모며 뼈를 갈아 넣는 애씀이 있었다. 그래. 분명 그랬다. 결과적으로 아이들은 애착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교사나 학부모는 마음고생이 정말 심했다. 한 학부모의 말처럼 학교 문턱이 낮으니 쉴 새 없이 학교를 드나들며 학교를 누구보다 잘 아는 학부모가 되었다. 학교가 궁금하지 않아도 학부모 참여를 독려하는 학교 분위기 때문에 가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모호한 경계선으로 얼마나 우리는 학교를 침범하기도 하고, 역으로 침범당하기도 했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전쟁통처럼 하루가 지나고 나면, 그제야 정신 차리듯 1년이 가고, 2년이 가고, 3년이 갔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집 둘째가 초등 입학을 앞두고 있다.


동사무소는 행정시스템을 도대체 어떻게 하는지 큰 애와 작은애의 학교를 다르게 입학시켜 놨다. 주소는 같은데 왜 학교가 다른지. 이해되지 않은 이 놈의 행정시스템. 정원 외 관리 대상인 우리 아이들은 일반학교에 1년에 몇 번씩 서류를 떼러 가야 한다. 재정은 재정대로, 행정시스템은 행정시스템대로, 모든 수고와 번거로움을 치뤄가며 나는 왜 아이를 굳이 기독대안학교에 보내고자 하는가?


둘이 합쳐 월 150은 예상하는 교육비를 학교에 지불해야 한다. 많으면 많고 적으면 적은 비용. 앞으로 막막한데도 꾸역꾸역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냐는 말이다. 대안학교에 다니는 가정들의 형편이 제각기 다르다. 어느 집은 1년에 몇 번씩 여행을 다니고, 해외를 다녀오고, 학원은 학교와 별개로 더 보내기도 한다. 그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내 속이 쓰리다. <공동체 공동체>하면서 상대적 박탈감은 교회와 학교에서 다 느끼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학교를 아직은 떠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우리 아이에 대한 집착이 끝나면 나는 아이를 일반학교에 그냥 보낼 수 있을까? 감히 생각이 들었다. 집착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집착이 좋은 결과를 내면 다행이다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3년을 돌이켜보면 나는 굉장히 낭만에 젖어 대안학교에 입학했고, 막상 대안학교의 실상을 접하고 나는 어느 일정 부분을 책임 회피하려 하고, 미꾸라지처럼 피해 다녔던 것 같다. 깊이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문제가 아닌 때가 없을 정도로 내가 속한 반과 아이들 사이에서 문제는 늘 있었고, 피할 수 없게 기도해야 할 것들이 참 많았다.


감사한 것은, 그런 와중에도 아이들이 그 문제 많은 대안학교에서 잘 자라준 것이다. 이상적일 것 같았던 대안학교에서 이상적이지 않지만, 고민하고 씨름하는 선생님들과 학부모들 사이에서 아이는 자라고 있었다.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학부모와 교사는 힘을 얻고 위로를 얻고 있었다. 생각보다 아이들은 성숙했고, 노잼인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서 아이들은 재미를 선사하고, 학교라는 공간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었다. 친구를 취사선택 할 수 있는 요즘 세상에서 여기 아이들은 취사선택이 어렵다. 애들이 없어서. 대신 어쩔 수 없는 결핍이 오히려 서로를 더 깊게 이해하게 만들었다. 여기는 선생님들이 일당백씩 뛰어야 하니, 아이들이 돕는다.


월평균 학교에 내는 돈을 생각할 때, <뭐야 이게 교육의 민낯이야? 대안교육이 이래도 돼?> 할 수 있다. 그런데  가난한 학교의 굴러가는 시스템이 영 맘에 들지 않아도 왜 엄마들은 이 학교에 내 소중한 자녀를 보내는 것일까? 보호차원? 일반학교가 너무 위험하니까? 그 말도 맞다. 온갖 뉴스와 소식을 접하고 지레 겁먹고 보내지 않기로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 집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3년의 시간. 큰애가 코로나 시기부터 걸쳐서 보낸 지난 3년의 시간은 아이가 이 학교에서 영글어가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대안교육의 핵심은 아직도 뭔지 모르겠지만, 아이를 밀어 넣고 학교가 알아서 해주겠지 싶었던 나에게 교육의 시작은 가정인 것을 깨우쳐줬고, 더 근본적으로는 엄마인 나부터 달라져야 함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변한 게 나는 하나도 없다. 그래도 아이는 씩씩하게 잘 자라주었다. 그러니 나는 이게 다른 무엇으로 설명이 되지 않아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2023년은 이렇게 끝나간다. 2024년은 아마 아이도 나도 조금씩 또 달라질 것이고, 학교도 가정도 변화가 있을 것이다. 가정도 학교도 은혜가 필요하다. 이기적 욕망이든 뭐든 은혜가 아니고서야 뭘 시작도 끝맺음도 할 수 없는 나약하고 허망한 존재인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교육의 이상이라는 것도 결국 허상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믿는 신념이라는 것 위에 은혜가 덮이지 않으면 참 위태롭겠다 싶었다. 이것이 대안교육의 민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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