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_23.12.25
내 세계에서 어떻게 하면 잘 보내리...
옘뱅. 유튜브랑 온갖 블로그를 보고 짜증이 났다. 나 빼고 다 잘 사는 것 같아. 남의 사생활에 관심 갖지 말고 방구석이나 치울 일인데 말이다.
교회에서 분명히 예배 잘 드리고 나왔었는데, 남편의 날 선 말투 때문에 나도 괜히 말투가 날 섰다. 살기가 힘들어서 우리 둘 다 이렇게 예민한 건지. 진짜 살기가 힘들다는 핑계를 대고 서로에 대해 무관심한 건지. 아님 둘 다 이 관계가 이제는 지치는 건지. 분명히 우리 둘은 관계적으로 무기력함이 보인다. 부모, 자식 간 이든. 부부간이든. 관계에 대한 무기력은 상대에 대한 더 이상의 기대감이 없다는 뜻이다. 나는 이 상태가 된 지는 오래이지만, 사실 나 자신으로써는 부부간의 관계를 노력해 왔던 것 같아 지금 이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책을 보든 영화를 보든 뭘 보든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만의 세계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이제껏 살아온 것이다. 쉽지 않은 선택과 다시 일어섬과 넘어짐, 후회와 슬픔 등을 안고 인생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래서 슬픔, 아픔, 후회, 연민, 자기혐오도 전부 인생의 연료가 되기도 했던 것 같다. 흠 없이 맑고 깨끗하기만 한 인생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늘 속임수에 넘어가듯 남의 캇톡, 남의 유튜브, 남의 것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이 사람의 밝음은 슬픔 없는 밝음>일 거라고 착각한다.
어머님이 갑자기 프로게이머 얘기를 하신다. 우리 아이들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운을 떼신다. 상대의 의도는 단지 손주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는데, 나와 남편은 벌써부터 방어한다. 이유는 단 하나. 그 마음이 온전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일일이 방어하는 대화는 정신이 지친다. 마음이 순수하게 느껴지지 않아 뭐든지 막아버린다. 진정한 대화는 마음이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되는데, 우리 가족은 의도치 않게 전달과정에서 꼬인다.
늘 나중에 생각해 보면, <아 그런 뜻이었을까?>한 발짝 늦게 깨닫는다. 나는 우리 부모(시모)에게 좋은 자녀였을까? 우리 남편에게 좋은 아내였을까? 우리 아이들이 나란 부모를 만난 게 행운일까? 불운일까? 결핍이 있는 부모는 좋은 부모는 될 수 없는 걸까? 부모도 한 개인일 뿐인데, 우리가 서로 간에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있지만, 어떻게 공동체로 잘 지낼 수 있을까? 맨날 이런 생각을 한다. 아이들에게 어른답지 못한 모습을 날마다 보이고, 숨기고 싶은 나를 들킨 것 같을 때. 나의 민낯이 날마다 건드려질 때마다 더 나은 부모가 되지 못해 <미안한> 마음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눈놀이를 즐겨하는 아이들이었다. 미안하지만 부모가 너무 피곤하다. 이유 모를 피로감과 무기력감. 아이들에게 내일부터 또 학교에 가고 신나게 놀 작정이니, <엄마 아빠 좀 쉬자>고 했다. 분명히 잠을 자고 나니 훨씬 낫다. 거실은 추우니, 방 안에서 TV를 보라고 했다. 그 옆에서 나는 잠을 잤다. 너무 시끄러우니 자는 것 같지도 않다. 신경질이 나고, 아이들도 낮잠을 재웠다. 아이들은 잘 잤다.
오늘과 내일이 연결되어 있다고 늘 생각했다. 그 말도 맞지만, 그 연결성 때문에 상대와 내가 절대 바뀌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한편 있어서 두려웠던 것 같다. 관계적인 면이든 나의 개인적인 삶이든 진실을 직면하려는 용기와 그럼에도 살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 같다. 생각보다 우리 가족은 함께 살아내기 위해 부단한 각자의 노력이 있었다. 상담이든 뭐든 하지 않았지만, 각자의 위치에서의 노력 말이다. 어머님은 어머님으로써, 남편은 남편으로써, 아이들은 아이들로써.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게 뭘까? 내 뜻대로 이들이 움직여 주지 않을까 봐? 가족을 위해 진짜 나의 삶이 다 희생하게 될까 봐? 두려움의 끝에는 항상 이기심이 있었다. 그러니 두려움에 속지 말아야 한다. 두려움을 가장한 이기심을 오히려 경계할 일이다.
아마 남편은 이걸 더 일찍 알아차렸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다. 그게 부부의 직감이니까.
앞날은 모르지만, 현실에 더 깊이 추를 내리고 무게중심을 잡고 싶다. 모르는 것에 더 알려고 하지 말고, 모르는 것을 흘러가게 두고 싶다. 호기심에는 책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적 호기심으로 더 나은 것이 나오지 않음을 알았다. 책을 읽을수록 드는 마음은 배움에도 절대적 책임이 따른다라는 걸 알았다. 실행에 옮기지 않는 앎은 자기 것이 될 수가 없어서 그냥 허공에 사라질 뿐이었다.
일기를 쓰는 이유는 내일이라는 기회가 올 때 결과는 모르지만, 다시 새 시작해 보자는 의미이다. 오늘은 망한 부모, 망한 한 개인이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후회를 각인시켜 내일은 뼈를 깎는 노력으로 나의 힘듦을 명랑하게 웃어넘겨 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