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 감정들이 우리 인생에 하는 일_23.12.18
나는 자주 느낀다. 환멸과 슬픔과 불편함 등을.
일상이 생각보다 어렵다. 어제 살았으니까 오늘은 더 잘 살 수 있겠지라는 생각보다 <참 뭐든 쉽지 않네>라는 생각으로 내일이라는 기회가 두려움으로 둔갑할 때가 참 많은 것 같다.
어제 식당봉사를 하면서 <나>라는 사람을 좀 알았다.
식당봉사를 하는데, 낯선 사람들이랑 웃으며 말하는 게 어색하고 긴장되었다. 상대에 궁금하지도 않고 뭘 얘기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미안한 건 내가 이런 마음이라는 게 풍기나 보다. 표정에라도 드러나지 않으면 좋을 텐데. 불편한 마음이 티 났는지 굳이 저쪽에서도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참. 나란 인간. 불편한 걸 어떡하나. 평소 센스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기력이 떨어지면 더 심각해진다. 얼굴에서 분위기가 풍긴다.
이런 내가 사람들과 어울려 식당봉사를 할 때, 눈에 띄지 않게 내 할 일 하는 게 중요했다. 일할 거리를 찾아 적당한 위치에서 일을 하는 것.
가서 보니 다들 먼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싱크대에 자리를 척척 맡아놓으셨으니, 나는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배식이 부족한 부분을 채우다가, 다시 식당 안쪽으로 들어가 대용량 밥솥을 맡았다. 밥솥을 조용히 닦으며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뭔가 말하고 싶지만 남들과 웃으며 말할 기력도 없고, 지금은 누가 궁금하지도 않다.
그리고 밥솥이 끝나자, 이제는 거대 국솥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고, 일부러 물어보지도 않았다. 맘 편히 혼자 한다. 이리저리 국솥을 둘러보고, <이거는 어떻게 닦는 걸까?> 궁리하다 보니, 국솥을 닦는 게 재밌었다. 신기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굳이 말 섞어가며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지 않아도 나는 나대로 내 할 일을 할 수 있었고, 국솥을 닦는 요령을 스스로 터득하며 즐거워했다.
거대 국솥을 돌려가며 국을 비워내고, 수세미로 닦으며 참 별거 아닌 것에 뿌듯해하고 있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 몫을 해냈다는 기쁨이 있었다.
그래도 모두가 함께하지 않으면 식당봉사는 어려울 것 같다. 그날 식당에만 몇 명이 투입되었던가.(몇십 명의 인원이 몇백 명의 식사를 감당하고 있었다.) 결국 각자의 몫을 하나, 결국 <상대>가 있지 않으면 식당은 돌아가지 않는다. 사람들도 나처럼 어색함을 이겨내 가며 자기의 일을 묵묵히 할 뿐이었다.
단지, 나는 그 솥을 어떻게 닦는지 비워내는지 혼자 요령을 터득해 가며 뿌듯해했다. 나는 탐구했었던 것 같다. 그 짧은 시간에. 그리고 그걸 즐겼던 것 같다.
거대 국솥을 어떻게 하면 잘 닦을 수 있을지 연구하는 것처럼, 나는 날마다 연구하는 것 같다. <인생을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지?> <변하지 않는 나와 변하지 않는 네가 어떻게 하면 상호협력하며 살아가지?><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처럼 자꾸 걸리는 것 같은 인생길에서 무엇이 최선의 선택이지?> 반복되는 일상 같은데 사사로운 문제들이 터질 때 나는 늘 변함없이 당혹스럽다. 지나고 보면 그게 그렇게 당혹스러울 일인가 싶으면서도 당시에는 나는 늘 깜짝깜짝 놀란다. 정말 별일이 아니었던 건지. 아니면 내가 그릇이 커진 건지.
일상에서 매일 느껴지는 환멸과 슬픔, 괴로움, 고통, 모순 등을 쏟아버리고 닦아버릴 곳이 필요했다. 그러다 문득 집에 들어오는 길에 드는 마음은 이런 부정적 감정들이 왜 굳이 깨끗해져야 한다고 난 생각했을까? 싶었다. 감정에 대해서도 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있지 않나. 정당한 감정만을 받아들이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 않고, 나란 인간이 그렇게나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뒤돌아보니 나의 후회, 미련, 슬픔, 죄책감, 열등감, 환멸, 분노 등이 질기도록 내 인생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게 이제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관계도 나는 긍정적 감정만 주고받길 원하지 않았나.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런 관계는 세상에 없다.
절망이 있어야 희망이 있듯, 내게 불현듯 나타나는 고질병 같은 부정적 감정이 이제는 인생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이 될 수도 있지 않나. 잠시 생각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