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단심> 드라마가 끝났다._24.12.18
사람은 입체적이다.
사람에 대해 <좋은 사람><나쁜 사람>으로만 나눴었다. 양극단으로 나누다 보면 사실 더 이상 말하기 싫은 사람은 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만나는 일상에서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순간적인 그 상황이 한 사람을 좋게도, 나쁘게도 만들 수 있는 걸 확인한다.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악하다고 늘 이분법적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니 <아 사람은 굉장히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구나>를 알았다. 정치의 세계를 보니, 우리네 삶이랑 같고,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기에 우리는 열심히 살 뿐이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인물들의 선택이 <이 사람을 악하게도, 선하게도 만들 뿐>이라는 것이다. 궁지에 몰리면 목숨을 잃을까 두려운 게 사람이고, 윗사람의 권력과 힘에 내 자리를 잃을까 주눅이 드는 게 사람이고, 말 한마디에도 상황이 달라질 수 있는 게 사람이었다. 상황을 만드는 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묘사가 참 대단한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힘없는 왕이 나온다. 아버지는 신하들의 세력에 밀려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품은 좋으나 지지세력이 없었다. 가족을 끔찍하게 아꼈으나, 결국 세자만 남았고 힘없는 아버지는 세자에게 유언이 <살아남으라>였다. (뭐 뻔한 스토리 같은데...) 머리가 비상한 세자는 왕이 되고, 수싸움은 시작된다. 공신세력을 어떻게 이기고 본인의 왕권을 든든히 할까. 그리고 신하들의 충심을 얻어내어 정치다운 정치를 할 수 있을까.
왕이 말하는 태도를 보면 겉으로는 공신이나 대비를 우대하듯 하지만, 그건 순전히 도리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의 속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신뢰하는 관계로 이어가진 않고 늘 경계하며 조심했다.
이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왕은 지키고 싶은 사람이 늘었다. 중전인데, 중전이 생각보다 영리하다. 중전은 왕의 행보를 걱정한다. 공신과 대비를 경계하는 이 왕이 결국 본인의 편만을 편전에 채우면 그다음은 어떻게 할까. 본인의 편만이 편전에 가득 찬다고 이상적인 정치가 가능할까. 그게 정말 왕의 뜻인가. 싶어 중전은 왕을 견제하기로 한다. 공신들과 함께 공신들의 입장도 들어가며, 자신의 감춰진 신분을 복원시키므로 왕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든다.
왕을 견제하는 중전은 본인의 뜻을 전하되, 본인을 중전이 아닌 충신으로 받아달라고 한다. 중전과 왕이 중전책봉례를 올리며 드라마가 끝나는데, 대사가 명대사다.
그대는 내 머리 위의 시퍼런 칼날입니다.
머리 위에서 겨누는 칼이 있어야 어좌의 무게를 안다 했습니다.
내가 온전히 믿는 유일한 안식처입니다.
평생 전하의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내 머리 위의 칼이자 내 안식처이니
나의 정인이자 나의 중전이며 나의 정적이여
이 드라마가 마음에 왜 남았을까.
내편과 네 편을 나누는 건 어디서든 똑같다. 내 말이 상대에게 설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런데 사실 나의 행실과 태도에 대해 100% 정당하진 않다. 그런 객관적 시각을 갖기가 쉽지도 않다. 그런데 누군가 정말 신뢰하는 관계 속에서 조언을 했을 때, 그걸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가능하냔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그런 조언조차도 싸울까 봐, 혹시 관계가 뒤틀릴까, 아님 무얼 잃어버릴까 싶어 말조차 꺼내지 않는다.
조직과 구조는 그렇게 무너지는 것 같다. 나는 이 왕과 중전을 보면서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보았던 것 같다. 신뢰의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한편 눈여겨본 것 같다. 작은 약속이라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상황이나 상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언이라도 상황이 시급하면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 게다가 나의 의견과 다를지라도, 나의 계획이 다 무너질지라도 상대의 말을 들어보는 마음이 있었다. 이게 현실에서 가능할까?
참... 그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