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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늘

미움이라는 강력한 에너지_25.2.18

열심히 살았는데, 뭔가 허망함을 느낀다.

by 소국

말이라는 게 참 무섭다.


사실 나는 내 뜻대로 내가 생각한 대로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내 모습이 정말 낯설었다. 이유는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은 이게 아니었다. 정말 살았나?


남들의 말을 방어하고, 피하고, 나의 마음과 생각을 외면하고, 소통 같지도 않은 말들을 오가며 하루를 보내고.. 그렇게 인생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답답함을 느꼈다.


남들은 그 정도면, 괜찮지 않냐. 감사할 게 얼마나 많은데 너는 그렇게 불평하냐. 아이들 그 정도 키웠으면 잘 키웠고, 가족들도 그 정도 잘 지내면 잘 지내는 것 아니냐.(그런데 내가 괜찮지가 않아. 매일이. 뭔 말만 하면 조언이며 훈계하니 말도 못 하겠어)


왜 나는 <대도시의 사랑법>을 보며 속이 다 시원했을까.


나다운 거 그런 거 모른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모른다. 생각보다 책임감도 없었고 객관적으로 볼 때 비겁하다. 남들보다 특출 날 것도 없고 아주 보통의(아님 그 이하) 삶이다. 늘 통장잔고 걱정에, 마지못해 가는 직장, 극성스러운 엄마에, 모든 원망은 남편에게 쏟는 대한민국 아줌마에 불과하다.


비겁한 아줌마는 아이들에게는 미디어시청을 제한하고, 밤늦도록 영화시청을 하며 아주 신났다.


그런데 부러웠다. 영화 속 인물들이.


깨지더라도 박살이 나보고, 부딪히는 그 패기가 너무 부러웠다. 그래. 이건가 보다.(40대의 푸념 같은가? 아니다. 나는 일상이 무채색이다. 기대가 전혀 없다. 우울증 환자 같을까? 하루살이의 삶 같아서 뭔가 이걸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게 무겁다. 보통 가장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 같다.)


패기.라고 단정 짓기에는 영화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많은 걸 시사하겠지만, 그냥 나는 내 삶의 기준에서 말하고 싶은 걸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부러웠던 것 같다. 말하고 싶은 걸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상황 때문에, 상대가 상처받을까 봐, 내가 용기가 없어서...... 등등 아주 천만 가지 이유가 많은데...


이게 나중에 문제가 터진다.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 아니면 제대로 전달이 안되면 나의 경우는 곯아 썩는다.


말이라는 게 그렇게 무섭다.

말-생각-마음.... 무서운 체계다.


사회생활도 쉽지 않고, 양육도 쉽지 않다. 말의 범위라는 게 언어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표정, 몸짓도 해당되는 거 아닌가. 이미 나의 표정에서 다 드러나는 법.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표정에서 이미 드러난다.


나는 최근 괴로웠다. 미움이라는 감정은 강력한 에너지다. 더 구체적으로는 원망이라고 해야 하나? 일상이 생각보다 다큐인데, 어떻게 행복하고 즐겁게 살라는 건지 고민이 컸다. 그래서 대상을 가리지 않고 미워하고 원망했던 것 같다. 아이들, 남편, 어머님이 날 힘들게 한다고. 삶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과거부터 지금까지 힘든 순간이 있었던 것 맞다. 그렇다고 삶을 그렇게 싹 다 살아봄직 하지 않는 것처럼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괴로웠다.


정답은 알겠는데, how to를 모르겠다. 신앙도. 삶도. 아이 키우는 것도. 나 하나 잘 사는 것도. 그래서 나의 방법은 다짜고짜 미워하는 것과 원망하는 것이었다. 다 니 탓이고, 다 구질구질한 인생 탓이고.


그런데 그냥 영화를 보고 나니 생각이 드는 건, 뭐 얼마나 잘살겠다고 난리법석들인가. 그냥 나랑 웃어주는 너만 있으면 괜찮은 인생 아닌가. 싶었다. 그놈의 미움이라는 것도 애정이 있으니 밉지. 무관심하면 밉겠나. 내가 정말 인생을 사랑하는구나. 아. 내가 정말 나를 사랑하는구나. 아. 내가 정말 가족을

사랑한가 보다. 정도 생각했다.


미움이라는 감정은 애정 없이는 나타날 수 없는 감정이다. 나에게만은 적어도 미움= 사랑이었다. 인생이 좇같아도(영화상의 표현) 살아볼 만한 이유는...

사실 모르겠다. 영화 같지 않은 후줄근한 하루, 멘털이 부서지는 거지 같은 하루는 힘들지. 영화상의 표현대로 좇같지. 그래도.. 일단 하루를 살아냈다.


그리고 결과가 뻔해도 사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게 낫겠다. 열심히 죽어라 살아서 죽는다...


미쳐버릴 것 같은 재정문제, 매일 산더미 같은 집안일, 인상이 찌푸려지는 미세먼지, 매일 투닥거리는 아이들, 집안꼴에 대한 가족들의 푸념, 다시 만나야 하는 직장의 직원들, 겉으로는 친절하지만 속내는 알 수 없는 학부모들, 행사로 치장되어 버린 학교와 교회, 각자 일로 바쁜 건지 그냥 마주하고 싶지 않은 건지 모르겠는 가족들. 그 안의 소통의 오류, 빗나간 대화들, 뒤늦게 깨닫는 속뜻과 의도들.


언어로 나열하니 인생이 아름다워져 버린다. 사실 더 처참한데 말이다. 하. 정말 그러고 보니.. <대도시의 사랑법>은 처참한 우리 인생을 미화한 것 같다. 그 인물들이 빛나보이는 이유는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해서도 아니고... 영화 속 인물이어서였구나 싶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내 삶이 더 처참하다. 인생은 다큐니까. 이 시간에도 뉴스만 틀어도 얼마나 끔찍한가. 비교급을 사용하여 인생을 비교하고 싶지 않다만...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는 사람이 수두룩하다.(그런데 난 그분들의 심정과 마음이 이해가 될 정도다.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지만 별로 삶이 기대가 되지 않는다.)


무채색의 삶은 그러면 도대체 어떤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아니. 희망이라기보다... 어떤 시각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무채색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내가 그토록 힘들어하는 가족, 직장, 나 자신에 대해서.. 나를 둘러싼 이 세상에 대해서.


최근에 본 영화 중 <대도시의 사랑법>과 비슷한 <대니쉬걸>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건 트랜스젠더에 관한 이야기이다. 굳이 극적인 소재가 아니어도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은 같다. 그냥 소재를 조금은 센 소재를 썼을 뿐. 게이나 트랜스젠더나 나나 다를 게 없다고 본다. 지극히 한 개인의 삶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의 기준과 규정 때문에 사실은 게이, 트랜스젠더뿐 아닌 그냥 아주 보통의 사람들도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게 참 어렵다. 그리고 나조차도 이편에 섰다 저편에 섰다 한다.


우리 아이들은 이미 이런 나의 모순적인 모습을 안다.

<엄마는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말하고, 내가 이렇게 말하고 또 이렇게 말한다> 엄마의 이중적이고, 계산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을 아이들은 보고 자란다.


찌질하기 짝이 없는 게 우리네 일상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말이다. 굴러다니라는 건가. 그냥 이리저리? 정말 how to가 있다면 알고 싶었지만, 교회를 백날 다녀도 모르겠다. 삶이 그렇게 무 자르듯 단순하고 명쾌하지 않다. 안갯속을 걷는 것처럼 대부분은 모호하고 잘 모르겠는 느낌으로 가득했다. 나이가 들면 자연히 알게 될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틀린 느낌이다.(아 그래서 내가 열받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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