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소소하게 불행하고 소소하게 행복했다.
구원자는 내 일상에 없다.
요즘은 드라마며 영화며 너무 대단한 것들이 많다. 그런데 일상은 생각보다 너무 퍽퍽해서 대비된다. 이 말도 이제는 지겨울 정도로. 아니 이런 내 생각이 변함이 없는게 민망할 정도로 똑같다.
쓸 말도. 쓸 것도 없는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을 때. 일말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을때 사람은 무엇을 기대하며 살 수 있을까? 무력함과 무기력함이 차곡차곡 쌓일 때, 옆사람도 눈치챈다. 함께 사는 사람에게 이 기운이 번질까 조마조마하며 내심 아닌척 한다. (함께 일하는 일터에서도 아마 사람들은 느끼지 않을까?)
누군가가 구원해주길 왜 바랬을까?
무슨 테스트 같은걸 했더니 주체성이 너무 빈약하게 나왔다. 의지하고 싶은건지 의존하고 싶은건지 알수가 없다.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삶을 살아본지가 언제인가? 사람이 태어나면서 죽을때까지 그렇게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며 살아야 하는게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감정조차도 상대의 탓으로 돌리기 바쁘다. 이유는 온전한 나의 결정이라는게 무겁고 무서웠나보다. 그렇게 인정하게 될 때 그 죄책감이란 너무 무거워서 죽어야만 해결될 것 같았다.
삶이라는게 그리 간단한게 아니어서, 죽음이 비겁한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악착같이 살았다. 그런데 허무했다. 내 열심이라는 게 아무것도 아닌것 같아서. 결국 이 정도 살려고 그렇게 아등바등이었나 싶었다. 가족들의 관계는 생각보다 좋지 않고 경제상황도 그렇다.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게 내 진심이고, 진정한 고민이다.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로, 아이를 만나는 교사로 아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제시할 수가 없다. 오히려 내 말이, 행동이, 태도가 순간순간마다 잘못되어 고개를 떨구게 된다.
하루도 쉬운 날이 없건만, 사람들은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 >며 말같지도 않는 말을 해댄다.
드라마틱하게 우리 일상은 구원자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