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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늘

깊은 두려움_25.9.30

앞으로의 나의 계획이 두려움에 의한 것이라면.

by 소국

막연하지만 이랬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이유는 현재에 불만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생각보다 한국사회 구조에 적응하지 못하는 1인 같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문화와 구조가 늘 불만이었다. 심지어 교회까지 다니다 보니 마음이 늘 무겁다. 이것은 분명 내 기질 탓이 한몫할 것이다. 뭐 하나를 가볍게 넘기지 못하고, 자잘하고 세밀한 것들이 보인다. 타인의 표정과 모습이 자꾸 보여서 모순적인 것들이 보이면 이내 불안함을 느낀다.


그런데 이런 내가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치열하게 40년을 사니, 정신이 제정신일리 없다.


교회라는 곳은 생각보다 너무 답답하다. 이유는 삶과 신앙이 연결되지 않아서였다. 우리가 무기력하고 우울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서라고? 우리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칠 것인가? 난 어제도 <여호와 경외교육>을 들으며 화가 났다. 현대인들의 삶을 전혀 이해를 못 하시는 것인가. 아님 하나님을 이해 못 하는 것인가. 목사님의 수준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적어도 교회는 더 깊어져야 하는데, 결국 말하는 것은 원론적인 것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신앙교육을 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교회를 등지고 다 외면할 것이다.


<신앙을 교육한다>부터가 잘못된 출발선 같기는 하다. 나조차도 엄마가 등 떠밀어 교회 나갔을 때는 신앙이 없었다. 착한 딸의 역할을 해내며 그냥 귓등으로 들었다. 스스로 신앙생활을 하기까지는 2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으니,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의 스텝을 밟게 될 것이다.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기독대안학교를 보냈던 것일까? 새삼 질문하게 된다. 무얼 기대했던 것일까?


교육의 방향성. 말은 좋으나 사실 교육 현장은 스킬에 불과했다. 기술은 익히면 된다. 그런데 양육은 그럴 수 없다. 그래서 교육과 양육이 다르다. 양육은 씨름을 해야 한다. 지루하고 기나긴 씨름을. 난 이걸 하기 싫었던 것 같다. 아이의 마음을 받고 아이의 생각을 듣고 아이의 괴로움을 함께 지는. 이건 가족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사회의 기본단위. 그런데 이 가족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애쓰는가. 돈을 벌고, 함께 여가를 보내고, 밥을 해 먹고, 가족의 시간을 같이 보내고.. 결코 헛되지 않음에도 별것도 아닌 것처럼 치부되어 버린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사니까. 꼭 나만 대단히 열심히 사는 건 아니잖아 라며. 나의 수고가 깎인 채로 그냥 하루를 무겁게 살아낸다.


그런데 사실 그 기본단위를 지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나만 잘한다고 지켜지는 것도 아니다.


나의 깊은 두려움은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도망, 회피등으로 말이다. 상호 소통이 되지 않은 관계에서의 불신은 결국 내 개인의 극단적인 결론으로 끝맺고야 만다. 소통을 하고 싶은데, 분명 나의 제안이 상대를 섭섭하게 만들고 만다는 생각 때문에 제안도 못한다. 상대의 입장을 다 안다는 이유로. 하. 이건 이민 가도 고쳐지지 않을 고질적인 병이다.


그러니 떠나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그러니 직장을 때려치우는 것만이 답도 아니다.


근본적인 나의 두려움이 변하지 않으면 세상도, 가족도, 심지어 나도 결국 그대로이고 말 것이다. (80년 이렇게 살아야 하나. 두려웠나 보다. 두려울수록 쓰고, 걱정될수록 쓰고... 나의 걱정과 두려움이 상대에게 전염시키지 않도록 일기장에 쓴다.) 아무리 두려워도 회피에 의한 계획은 절대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음을 기억하자. 현재 지금 이곳에서 충실히 살지 못하면, 그다음 스텝도 없다.


난 아직도 여전히 쳇바퀴 굴리는 햄스터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래도 하중을 잘 견뎌서 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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