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 딸 아이의 첫 등산화

by 생각의향방

"아빠, 나 산에 갈 때 신는 신발 사줘"


11월의 첫 주말, 산책 겸 동네 쇼핑몰을 거니는 와중에 초등학교 3학년 딸아이가 말했다.

얼마 전 새 운동화를 사줬는데 뜬금없이 등산화를 사달라니 의아했지만

표정이 사뭇 진지해 바로 옆 아웃도어 매장에 들어가 제일 작은 사이즈의 등산화를 찾아 신겨봤다.


다행히 제일 작은 220mm 사이즈의 등산화가 아이의 발에 쏙 들어갔다.

다소 큰 감이 있었지만 깔창을 넣고 두꺼운 양말을 신킨다면 충분할 것 같았다.


신발을 신켜보며 "등산화는 갑자기 왜 신고 싶어졌어?"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빠랑 겨울에 눈 오는 산 가야지" 라고 말한다.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산 좋아하는 아빠의 등에 업혀 여러 산을 올랐던 아이였다.
초등학생이 되면서 더 이상 업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일 년에 두세 번은 봄 가을로 가까운 산은 함께 올라주며

"아빠 내가 이렇게 같이 와주니까 좋지?"라며 생색을 내던 아이였다.


그런데 먼저 겨울 산을 떠올리며 등산화를 사달라니,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설렜다.


"갑자기 산은 왜 가고 싶어졌어?"라고 물으니

"지난여름에 운동화 신고 너무 힘들었어"라고 답한다.


아이가 힘들었다던 지난여름, 우리 가족은 인제의 산골로 휴가를 갔다.

말이 휴가였지 계곡 트레킹, 자작나무 숲 트레킹, 내린천 리프팅까지

매일 지쳐 쓰러져 잠들던 일정들이었다.


그중 딸아이가 가장 힘들어했던, 그러면서 가장 웃고 즐거워했던 일정은

12Km 계곡길을 8시간 동안 걸으며 3000칼리로 넘게 불태운

인제의 아침가리 계곡 트레킹이었다.


7월의 마지막 날 30도가 넘는 땡볕 속에서 시작한 그 트레킹이

아이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았나 보다.


아침가리 계곡 트레킹은 계곡을 따라 임도나 데크로 걷는 여느 트레킹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우리는 휴가 한 달 전부터 장비를 챙기고 유튜브를 보며 준비했다.

한번 들어가면 중간에 나올 수도 없는 코스를 9살짜리 아이와 걸어야 했기에 내심 걱정도 됐던 일정이었다.


제일 먼저 방수 가방을 사고, 아이에게 맞는 등산 스틱을 주문하고,

물안경과 스노쿨, 그리고 바다에서나 쓰던 부위까지 챙겼다.

옷은 역시 물놀이에나 입던 레쉬가드를 챙기고 GPX 경로 까지 저장해 뒀다.


계곡 안으로 들어가 발목에서 무릎, 허리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때로는 머리 위까지 오르는

계곡물을 계속 따라 때로는 걷고, 때로는 수영을 해야하고, 때로는 바위를 타고 올라야 하는

말 그대로 진정한 계곡 트레킹을 위해서는 이 정도 준비는 해야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까지 고민한 것이 신발이었다.

아쿠아슈즈를 신어야 하나, 물이 빠지는 트래킹 샌들을 신어야 하나,

아니면 등산화를 신고 그대로 물에 들어가 젖은 채로 계속 걸어야 하나에 대한 고민이었다.

결국 우리 부부는 등산화를 신고 아이에게는 평소 신던 운동화를 신키기로 했다.

아동용 등산화가 있는지도 몰랐고, 괜히 새 신발을 신켰다가 불편하기도 할 것 같아서였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두발에 스틱, 그리고 부위와 팔튜브 까지 끼고선

걷다 수영하다를 반복하며 아침가리계곡 트레킹을 완주해냈다.


그 길의 가운데에서 아이는 즐거워했고 행복해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는 누구보다 뿌듯해했고 자랑스러워했다.

9살 인생의 가장 의미있는 성취를 하나 해냈다는 얼굴이었다.


그 여름의 기억이 좋았는지 아이는 겨울의 도전꺼리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눈이 오면, 혼자 산에 가던 아빠가 생각났었나 보다.

9살 인생의 새로운 도전을 위해, 아빠와의 산행을 위해

등산화를 사달라던 딸아이의 요청이 무척이나 반갑고 기특했다.


핑크핑크한 공주님 신발도 아니고, 유행하는 캐릭터 신발도 아니고,

아이돌이 광고하는 유명 메이커의 신발도 아닌

아빠와 눈 오는 날 함께 산에 오르기 위한 신발을 사달라는 딸,

난 그런 딸을 가진 아빠다.


이런 생각들들 하면서 신발은 사지 않고 매장을 나왔다.
동네 작은 매장이 아니라, 더 큰 곳에서 더 좋은 신발을 골라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눈이 오기 전, 나는 아이에게 220mm 등산화를 사줄 것이다.
겨울 산에 맞는 방수 소재, 미끄럼 방지, 발목까지 단단히 잡아주는 다이얼 잠금.
마음에 든다면 가격은 보지도 않고 결제할 것이다.


곧 발이 커져 한 철밖에 신지 못할 신발일지라도,
눈 덮인 겨울산에서 아빠와 함께 오르고 싶다 말하는
9살 딸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아깝지 않다.


2025년 여름의 아침가리계곡 트레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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