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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 Kim Aug 19. 2018

벗어나는 순간 보이는 것들

어쩌면 완전히 달라질 오늘을 위해

  



호텔이랑 온천은 예약했으니까 오사카 행 비행기 티켓만 끊으라던 친구의 말에 알겠다고 답했다. 전 재산을 털어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그 당시 나는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꽉 낀 상자 속에 가만히 누워있는 기분이었다. 24시간 매일, 나를 억누르고 지배하는 압력들이 점점 더 심해졌다. 그러다 최근 2년 동안 휴가다운 휴가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 더도 말고 딱 이틀만. 1년에 딱 이틀만 무거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러다 소설에 질식해서 인생이 잠길까 봐 두려웠다.




4월의 오사카는 서울보다 온도가 2도 높았다. 늦봄과 초여름의 날씨였다. 새로 산 반팔 셔츠와 청바지를 입기 좋았다. 무엇보다 하늘이 맑고 공기가 깨끗했다. 나는 지하철에 앉아서 카메라 뷰파인더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구도를 잡고 카메라를 움직이면, 화면 속 장면들이 빠르게 변했다. 다리를 건널 때는 햇빛을 반사하는 강물을 찍었다. 산속 비탈길을 오를 때는 숲 속에 옹기종기 지어진 귀여운 집들을 담았다. 욕심 같아서는 모든 장면들을 갖고 싶었다.





고베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2천 장에 가까운 사진들을 넘기면서 역시 남는 건 사진이군,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내가 정말 소설을 쓰는 게 맞을까? 하는 고민이 또다시 튀어나왔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 사진을 찍고, 새로운 장소에 가서 새로운 장면들을 담는 게 더 맞는 사람이 아닐까? 내가 무언가 해야 한 다면, 소설쓰는 거 말고 다른 것 아닐까? 또 다시 불안함이 밀려오는데, 친구가 자기도 사진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액정 속 사진을 하나씩 넘겼다. 


그리고 그 시간이 돌아왔다. 이 사진에 대한 제 점수는요....친구에게 사진이 이게 뭐냐, 구도가 이게 뭐냐, 하고 투덜거렸다. 친구는 자기는 그런 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사람만 나오면 돼, 사진 속에서 다리가 잘리는 게 무슨 상관이야 지금 나한테 다리가 있잖아. 호수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는거 하나도 안 거슬려, 하는 말에 나는 답답함에 한숨만 쉬어야 했다. 


"야, 봐봐. 뒤에 배경이 다 기울어지면 나도 뭔가 피사의 사탑처럼 비뚜루게 서있는 기분이라고. 이거 봐, 소설짐 하나도 안 지켜졌잖아. 모든 사물들은 하나의 점을 향해 가야 한다니까?"

"왜?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소실점이 그리고 뭐야."

"너 정말 이 구도가 하나도 신경쓰이지 않는단 말이야?"

"이런 건 너만 신경쓰는 거야."


나만? 

그 구도가 나한테만 중요하다는 말이야? 발목 잘린 사진을 보면 내 발목이 잘린 것 같고, 기울어진 배경을 보면 나까지 기울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너는그렇지 않다고? 응. 맙소사. 


 



나는 구도를 중시했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했기 때문인지, 언제나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던 아빠의 영향인지 구도라는 단어를 몰랐을 때부터 구도가 중요했다. 프레임을 잡고, 소실점을 잡고, 수평을 맞추고 수직은 최대한 기울어지지 않게 찍는 것이 내게는 안정감의 기반이었다. 내가 써야 하는 소설도 똑같았다. 중심점을 잡고, 구조를 만들고, 그 안을 채우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그게 나와 맞는 글쓰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다 지금껏 고민하던 ‘내가 써야 할 소설의 모습’을 발견했다. 내가 찾은 것은 뷰파인더로 프레임을 만들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 이미지를 담는 내 모습이었다. 구도를 잡은 뒤, 아름다운 것들로 안을 채우는 것. 머릿속으로만 빙빙 돌던 사실들이 비로소 몸으로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이거 찾아내려고, 바다 건너 오사카까지 왔구나.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소설을 써도 되는 사람이었지, 내 방식대로. 내가 찾아낸 나만의 방식대로. 쓰고 싶으면 쓰는 거지, 그런 자격이 뭐가 필요하겠어, 그냥 불안하니까 그런거였다. 내가 하고있는 방법이 맞는지, 아닌지.   

  

오사카 도톤부리 주변, 시장, 음식들.




가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게 놓치게 되는 것들이 생긴다. 마음의 여백까지 생각으로 꽉 채우다 보면, 여유가 사라지고 답답함만 쌓이는 것이다. 그럴 때는, 현실을 벗어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비로소 그 자리를 벗어나는 순간, 현실에 매여서 보이지 않던 것을 밖에서 볼 수 있게 되니까. 


기차가 달려가는 산등성이의 풍경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까와 비슷한 청록의 잎사귀와 푸른색 하늘이 조금 달리 보였다. 잠깐의 벗어남으로 나의 시야는 이전과 달라졌음을 느꼈다. 문득 나는, 어느새 내가 낯선 동네로 들어왔음을 알았다. 분명 이곳은 내가 지나온 곳과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았다. 조금씩 변하던 풍경들이 어느새 완전히 달라졌다. 그렇게 낯섦에서 발견한 나의 일부를 갖고 다시 돌아왔다. 똑같이 밥을 먹고 숨을 쉰 대도, 이제 나의 하루는 완전히 달라질 것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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