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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 Kim Aug 11. 2018

너는 왜 여자 아이돌을 좋아해?

작가 지망생이 이야기하는 레드벨벳의 소설적 매력


D의 집에는 좋은 스피커가 있는데, 자기는 어떻게 해야 노래가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내가 올 때가 노래를 틀어 달라고 했다. 노래 트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니까 그건 또 귀찮다며 그냥 내가 올 때마다 알아서 해달란다. 정말이지 할머니네 놀러 온 손녀딸이 된 것 같았지만, 어쨌든 그때부터 늘 선곡을 담당했다. 


그날도 D는 남편 셔츠를 다리겠다며 안방에서 다림질 도구를 가져 나온 참이었고, 나는 늘 그렇듯 스피커 잭을 휴대폰에 연결했다. 스피커에서 레드벨벳의 최신 앨범 수록곡들을 차례로 틀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들로 우리만의 플레이스트를 채우는 것. 그것이 내가 DJ가 된 순간부터 정해진 운명이랄까.  


“그런데 너는 왜 여자 아이돌을 좋아해?”


“너 또 유교계의 대모 같은 소리 한다.”


“아니, 그렇잖아. 남자 아이돌도 아니고.”


온 집안에 울려 퍼지는 - D가 궁금해하던 ‘여자 아이돌’ 노래를 BGM 삼아 - 입을 열었다.

자, 들어 봐, 친구야. 

 



글 쓰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브랜드의 기획력과 시스템, 캐릭터를 사랑하지.


“소설을 쓸 때 기획이나 구성, 문장과 캐릭터는 굉장히 중요하거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레드벨벳이 굉장히 잘 쓴 소설 같다고 생각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콘셉트 기획력이야. 

소설을 쓸 때 설정이 단단하면, 뒤는 그냥 써져. 세계는 구축됐다는 거니까. 캐릭터들은 그냥 그 안에서 살아가면 되는 거지. 비슷한 맥락에서, 레드벨벳은 처음부터 세계관을 공고히 구축했고, 앨범을 낼 때마다 조금씩 보여주는 것 같아. 콘셉트가 계속해서 이어지니까 세계관을 점차 확장할 수 있고. 소설로 치면 끝까지 다 짜 놓은 다음에 1회부터 연재로 공개하는 거랄까? 이게 얼마나 날 설레게 하는 줄 아니? 글 쓸 때 세계관 설정 여기저기에 뿌려놓고 혼자 신나 하거든? 읽는 사람들이 이거 발견할까? 하고. 알 사람들은 알아라! 하는 건데, 이런 거 좋아하는 독자들은 알아서 해석하고 토론하면서 세계를 확대하지. 괜히 전 세계에 해리포터 성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니까?


아이린

레드벨벳의 독특한 콘셉트 중 하나는 무표정이야. 레드벨벳의 티저 사진만 놓고 본다면 그들은 늘 정면을 똑바로 보고, 웃지 않지. 여자 아이돌이 웃지 않는다니, 정말 획기적이지 않아? 게다가 잔혹한 티저나 뮤비도 어찌나 많은지. 그 세계에서는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다 제거해 버린 것 같단 말이야. 그런데 마냥 무섭거나 기괴하지 않아. 오히려 독보적인 콘셉트에서 확고함이 느껴져. 다른 사람들에게 주도권을 넘기지 않겠다는 자신감이지. 자기 주도적인 여성, 너무 멋있지 않아? 


대중의 기호도 중요하지만, 레드벨벳은 자신들만의 노선으로 밀고 나간 거야. 대중의 취향을 따라 안전하게 가는 브랜드라 아닌 것 같아서 좋아. 실력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 이제부터 우리가 이런 걸 보여줄 건데, 따라오겠어?' 하는 느낌인 거지. 일관성 있는 세계관 안에서도 계속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니까 대중도 따라오게 된 거 아닐까? 이번엔 레드벨벳이 어떤 노래로 나올까? 뭐든 안 좋겠어? 일단 듣고 보자, 하는 거 말이야. 


슬기
모험일 수 있는 콘셉트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시스템과 자본.


그런데 분명 이렇게 꾸준히 한 콘셉트로 밀고 나가는 게 과연 쉬운 일은 아닐 거야. 사실 아이돌이라는 브랜드로 성공하려면 대중에게 선택을 받아야 해. 아무리 획기적인 콘셉트라도 대중에게 외면되면 실패할 가능성이 커. 소속사들도 대중의 반응을 보고 콘셉트를 계속 수정되거나, 아예 대중의 선호도에 맞춰 앨범을 낼 가능성도 높지. 이 브랜드의 기획자들도 분명 많이 흔들렸을 것 같아. 소설 쓸 때도 얼마나 흔들리는데. 내가 좋아하는 걸 쓸지, 대중이 좋아하는 걸 쓸지. 그래서 어떻게 보면 모험일 수 있는 콘셉트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시스템과 자본인 것 같아. 소속사가 대형 기획사라서 가능할 수도 있었겠지. 

 


웬디



사랑받기를 원하고, 선택받아지는 수동적 입장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내가 주도권을 갖겠다는 주체적인 여성상의 모습도 보이고.


실제로 레드벨벳은 여자 팬들이 더 많아. 뭔가 여성의 당당함이나 자신감 있는 모습을 계속 어필하거든. 노래 속 화자는 늘 자신이 선택하려 해. 사랑받기를 원하고, 선택받아지는 수동적 입장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내가 주도권을 갖겠다는 주체적인 여성상의 모습을 노래하는 거지. 피카부 뮤비에서 총 들고 화살 쏘고 다 해치워버리겠다 하는 거 보고 정말 이런 뮤비가 여자 아이돌에서도 나올 수 있구나 하고 희열을 느낀 사람이 한 둘이 아닐걸? 이 세상은 싹 다 밀어버리고 이제 내가 해결하도록 하지, 이런 느낌? 이러니 여자들이 안 좋아할 수 있겠냐고. 물론 어디까지 레드벨벳이라는 브랜드에 한정된 이야기지만 말이야. 주체적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거야. 내가 주도적으로 해결해 볼게, 하고. 


조이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에 충실해야 해야 한다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레드벨벳 멤버들은 굉장히 잘 쓴 문장들이라 생각해.


아무리 소설의 콘셉트를 잘 잡고 자본이나 시스템을 구축했어도, 소설의 기본은 갖춰져야 사람들이 읽겠지? 캐릭터나, 문장 그런 것들 말이야. 소설뿐만 아니라 모든 일은 기본에 충실해. 그런 의미에서 레드벨벳은 노래가 정말 좋아. 멤버들의 목소리도 합이 잘 되고 소화력도 좋은 것 같아. 아티스트로서 개개인의 기본 역량이 강한 느낌이야. 춤이든, 노래든, 아이돌력이든. 아마 그 역량을 아니까 SM에서도 레드벨벳에게 계속 트렌디하면서도 좋은 곡들을 주는 거겠지?  


SM엔터테인먼트 A&R 풀이 엄청나게 넓고 송 캠프도 있어서 전 세계에서 작곡가들로부터 트렌디 한 곡을 매주 몇 백 개씩 받는 곳이니까 좋은 선택지가 많겠지. 덤덤이나 루키처럼 중독성 강한 것도 있고 러시안룰렛처럼 세련된 것, 빨간 맛은 말해 뭐해 국민 픽이지. 배드보이는 힙합, 7월 7일은 발라드 - 아이돌, 특히 걸그룹이 타이틀로 발라드 내놓기 힘들잖아. 그걸 레드벨벳이 해냈다? 이렇게 장르도 댄스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발라드, R&B, 힙합까지 다양해. 뮤직비디오 콘셉트와 기획력은 또 어떻고. 피카부도 그렇고, 배드보이도 그렇고 콘셉트와 스토리가 독특해서 찾아보는 재미가 있어. 오마주도 많고.   


그래서 나는 레드벨벳이 굉장히 잘 쓴 문장들이라 생각해. 멤버들이 자신의 캐릭터를 잘 소화하고, 기본기가 단단하고, 역량 활용도도 높고.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레드벨벳이라는 팀을 수행하는 ‘역할’에 한정된 이야기고, 그 후의 사생활이나 이런 건 난 모르지. 그래도 아직까지 큰 문제 안 일으키고, 자신들의 일을 사랑하고 즐겁게 하는 모습 보여주면서 성장하는 모습 보면 괜히 뿌듯하고 그래.


예리


그러니까 나는 여자 아이돌을 좋아해서 레드벨벳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레드벨벳을 좋아하는데 그들이 여자인 것뿐


나도 내가 아이돌을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어. 학창 시절에 정말 단 한 번도 관심 간 적 없었거든. 그런다 어느 날, 내가 되게 관심 있는 것들을 충족시켜주는 사람들을 발견한 거고, 그게 레드벨벳이라는 그룹이었던 거지. 기획력, 시스템, 캐릭터들의 합이 딱 맞아떨어져서 계속해서 성장해 왔으며, 지금 빛을 발하고 있는 레드벨벳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었겠어? 글 쓰는 사람으로서 너무 흥분되는 거 있지. 어떻게 이런 생각을 쭉 밀고 나갈 수 있었을까, 대단하다. 이런 거. 그러니까 나는 여자 아이돌을 좋아해서 레드벨벳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레드벨벳을 좋아하는데 그들이 여자인 것뿐? 뭐 이런 거지. 




말을 마치고 친구를 바라보았다. 친구는 그 사이 셔츠 4벌을 다리고, 5번째 셔츠를 집어 들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너 말 들어보니까 그런 것 같아.”


그녀는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레드벨벳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림질을 이어갔다. 나는 소파에 누워서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눌렀다. 이 봐 친구, 일단 이 얼굴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사진출처: 레드벨벳 홈페이지 갤러리 http://redvelvet.smtown.com/ 

레드벨벳 - SM엔터테인먼트 / 아이린, 슬기, 웬디, 조이, 예리. / 2014.08.01~


*캡처 및 문구 인용 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특히 트위터요 ㅠㅠ 너무 일부 문구만 캡처한 이미지들이 돌아다니네요 ㅠㅠ.. 얼마든지 써도 좋으니 출처만 밝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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