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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 Kim May 25. 2017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마

하지만 앞이 안 보이는 걸

버스에서 잘못 내렸다. 안내방송에서 익숙한 지명이 나와서 다급하게 내렸는데, 노선표를 확인하니 두 정거장 더 가야 했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 있다는 사실은 롯데월드타워를 보고 알았다. 정류소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몸을 돌려 내 뒤쪽에 있는 타워를 확인하고 집으로 걸어가곤 했으니까. 내 앞쪽에 서있는 타워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젖혔다. 밤하늘이 까맸다. 새벽 1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결국 오늘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막차를 놓친 것 같아서 낮에는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길을 걸었다. 


바람이 불어서 시원했지만, 이상하게 속이 끓었다. 타닥타닥. 걸음을 옮길수록 버켄스탁이 시멘트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만 크게 울렸다. 근처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내 옆을 지나갔다. 아직 막차가 있었나 보네. 오늘은 뭘 해도 안 되나 보다. 어둠 속에서도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버스 꽁무니를 쳐다보다가 다시 걸었다.


누군가 생각이 났다. 지금까지 잘 지냈으면서, 왜 꼭 그 사람은 이렇게 암담할 때 떠오르는 줄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핸드폰을 가져오는 게 아니었다. 2주 동안 꺼놨으면서 왜 가져갔지? 하지만 이미 핸드폰을 열고 너무나 익숙한 숫자를 누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제대로 생각을 했다면 정류장도 헷갈리지 않았을 거고, 소설도 훨씬 잘 썼겠지. 지난 2주간의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망했다, 망했다. 앞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고, 전화를 걸었다. 늘 똑같은 컬러링을 들으며 조금 숨을 들이켰다. 잠시 후, 기억 속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언젠가 보내주려고 옥상에서 찍었던 풍경.  어두워야 잘 보일 수 있었던 상황, 아마도 내 결점들.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마. 


오랜만에 듣는 멘트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합평 수업에서도 오랜만에 듣는 말이 있었다. 소설이 너무 착해, 소설이 너무 착해. 근본적인 문제에 또다시 봉착했다. 지난번에 칭찬받았다고 우쭐했는데 또다시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생각을 너무 안 한 걸까, 내가 고민을 너무 안 한 걸까, 내가 너무 몸 사린 걸까. 낮에 염색을 하고 머리색만 바뀌면 뭐 해. 나는 변한 게 없었다. 


우울한 건 바닥치고 올라오는 거야.


바닥인 건 어찌 알고. 오랜만에 느끼는 막막함이었다. 나도 모르게 찾아온 슬럼프인 걸까? 기분이 종잡을 수가 없다. 심지어 오늘 낮까지도 괜찮았는데, 합평하면서 많이 우울해졌다. 이제 등단까지 얼마 안 남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고개를 들어 롯데월드 타워를 바라보았다. 손을 뻗으면 검지로 꼭대기를 두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착시였다. 지난 내 시간과 기대감들도 전부, 착시였다.





고향에 내려가 있던 어느 날 창밖 풍경. 이건 눈앞에 산이 있어도 봉우리가 안 보이는 상황, 지금 내 심정.



있잖아, 나 등단하면 연락하려고 했어. 

그런 건 등단하고 말하면 좋았잖아. 

그러게 그럴걸. 


잘 들어가,라고 말했고 나는 잘 지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쪽도 잘 지내,라고 말했다. 

끊고 나서는 눈물이 좀 났다. 이제 우리는 '잘 지내'라고 말하고 통화를 마무리하는 사이가 되었다. 잘 지내가 뭐야, 잘 지내가. 코를 한 번 훌쩍이고 깜깜한 공원을 걸어갔다. 


공원을 삥 돌아가면서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첫 번째는 빨리 등단하고 싶다. 두 번째는 까짓것 엄청 멋있는 소설을 써낼 거야, 두고 봐 (하지만 집에 오자마자 너무 우울해서 손에 잡히는 대로 소설책 한 권을 펼쳐서 읽다가 잠들었다.). 세 번째로 나는 소설을 쓰면 안 되는 사람인데 잘못된 선택을 한 건가? (지난달에는 소설 쓰는 게 돌고 돌아온 네 운명이라는 말을 들었으면서) 네 번째로 내가 너무 몸 사리면서 썼나 봐, 이제 진짜 몸 사리지 말고 써야 해 (하지만 그러다 진짜 죽으면 어쩌지?). 다섯 번째로 또 여섯 번째, 일곱 번째로…. 거리에 새겨지는 발자국만큼 늘어나던 생각들. 나는 그렇게 수십 번의 일희일비를 하고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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