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지혜』 287 관객은 경기에 참여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
축구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뛰어 다닌다. 패스를 제대로 해서 정확하게 골로 연결하면 좋겠는데, 선수들은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경우가 있다. 패스하다가 실수하기도 하고, 자살골을 넣을 때도 있다. 관객은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싶다. 소리도 지르고, 응원도 해보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작은 할아머니께서 어제 돌아가셨다. 오늘 아빠와 언니, W와 함께 부산에 다녀왔다. 명절 전이라 기차표가 없어서 발인은 토요일이지만 목요일 기차표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새벽 5시 58분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기차표가 있어서 구했다. 올라오는 기차표도 구해야 했다. 다행히 목요일 저녁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아빠는 2시 정도면 되지 않겠냐고 하셔서 2시 50분 기차표를 예매했다. 막상 도착하니 빈소가 정리되지 않았고, 영정 사진도 도착하지 않았다. 계속 머무르기 보다는 가족들이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게 좋겠다며 우리 식구들은 잠시 밖에 나갔다. 은행에도 다녀올 겸 한 바퀴 돌아왔다. W는 조금 늦게 도착했고, 함께 합류해 다시 빈소를 찾았다. 기차표가 없어서 우리 셋만 내려가려고 했지만, W는 수서역에서 출발하는 SRT를 겨우 구했다.
W까지 장례식장에 다녀오는 것에 대해 내 경우는 기차표만 생각하고, W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선택권을 준다고 생각했었지만, W 입장에서는 그 선택권이 심적으로 불편했던 모양이다. 오고 싶으면 오라는 말이 가야 하는 지 가지 않아도 되는 지 우리측 식구들의 분위기를 모른다는 데 있었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서울로 올라와 집으로 오는 길에 W는 선을 그어주길 바랬던 모양이다. 시댁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W는 내게 굳이 가지 않아도 된다며 선을 그어 주었다. 나는 그래도 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W의 배려로 마음 편하게 서울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그렇게 해주지 못해서 부산까지 내려왔지만, W가 느끼기엔 친척들이 왜 저 사람까지 내려왔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W가 내게도 그런 상황이었으면 어땠을 지 되물었을 때, 그제야 나의 이성적 판단이 생겼다. 관객의 입장에서 내 감정만 앞세웠다는 걸 발견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시야각은 좁다. 그래서 경기장 안에서 뛰어다니는 선수와 같다. 감정에 휘둘리는 건 바로 경기장 안에서 나만 볼 수 있어서다. 경기장 밖에서 관객의 입장이 되면, 전체적인 흐름이 제대로 보인다. 타인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라는 걸 깨닫는다.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조금 더 볼 수 있다. 두 걸음 물러서서 보면 더 넓게 보인다. 불안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혼자만의 세상에서 허우적 거리다가 불안해질 수 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한 걸음 물러서서 관망할 수 있다면, 불안증세에서도 이성적인 관객의 모드로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감정은 선수고, 이성은 관객이다.
초고를 쓰는 건 경기장에서 뛰어다니는 선수와 같다. 한 꼭지씩 써내려 갈 때는 다른 선수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초고를 완성하고 퇴고를 시작하면 그제야 경기장 밖의 관객이 된다. 독자를 위한 메시지가 있는 지, 누락 된 부분은 없는 지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다. 여전히 시야각은 좁지만 말이다. 즉, 초고는 선수고, 퇴고는 관객이다.
『사람을 얻는 지혜』 287 관객은 경기에 참여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본다.
"결코 정념에 이끌려 행동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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