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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라 Apr 23. 2018

비가 온다

어느 고3 담임의 일기

 아침부터 비가 제법 많이 왔다. 창에 가득한 빗방울들 그 너머로 보이는 물먹은 초록들은 빛을 받지 않아도 더 선명하다. 비가 오니 지각하는 아이들도 많다. 수빈이는 버스를 타면 학교 오는데 한 시간이나 걸리고 택시도 잡히지 않는다며 결국 지각을 했다. 우산을 쓰고 걸어오는 아이들도 대부분 옷이 흠뻑 젖었다. 이토록 힘겹게 아침일찍 학교에 오는 이유는 뭘까. 그건 아마 우리가 서로 만나기 위해서일거다. 물론 매일매일, 가족보다도 더 진하게 밤 늦게까지 보는 사이들이지만, 그래서 그 소중함을 더러는 잊고 살지만 우리는 서로 만나기 위해 아침 일찍 눈을 뜨고 집을 나선다. 지금의 만남은 아마도 세월이 지날수록 희미하고 미화된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추억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지금 미래의 추억 속에 살고 있다’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이 순간이 미래의 순간에만 가치로운 것은 아니다. 오늘도 우리는 만나고 웃고 떠들고 공부를 한다. 내일을 이야기하고 현재의 힘듦을 위무한다. 무수한 빗방울 사이로 우리의 모습들이 추억이 되어 흐른다. 


 영아가 눈병에 걸렸다. 유행성 결막염 진단을 받았다. 영아는 좋은 모양이다. 싱글벙글이다. 다음주부터 1회고사인데 일단 이번주는 학교에 나오기에 글렀다. 빨개진 눈으로 마냥 웃고 있는데 영아가 없는 빈 책상이 허전하다. 38명이나 되는 북적한 교실이지만 한명이라도 없으면 서운할 수 밖에 없다.    


 요즘은 동주나 육사, 지용 등 아름다운 우리의 시인들을 배운다. 시인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음악을 틀고 낭송을 한다. 시대를 오롯이 살아낸 시인의 삶은 오늘날 활자가 되어 여기 학생들의 책상 앞에 놓여 있다. 표정들을 봐서는 감동을 받았는지 그저 졸리기만 한지 모르겠다. 나는 바란다. 아이들이 시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라났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시인 한명쯤은 가슴 속에 품고 있으면서 시 한 편쯤을 욀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직업적 시인이 아니더라도 삶의 장면들에서 시를 발견하고 시적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먼저 울고 가장 늦게까지 우는 사람’이라 했다. 이러한 공감과 연대의식을 배웠으면 좋겠다. 이것이 내 문학교육의 목표다. 그리고 이맘때의 아이들은 모두 시인이라는걸 나는 안다. 

오늘은 비가 시처럼 내리고 시는 비처럼 마음을 적신다.


                                                                                                   

                                                  2018.04.23.




 인간은 오늘을 산다고 하지만 어쩌면 단 한순간도 현재를 살고 있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한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때와 오늘을 비교합니다. 미래를 꿈구고 오늘을 소모하죠. 기준을 저쪽에 두고 오늘을 이야기합니다. 그때보다, 그때 그 사람보다, 지난번 그 식당보다, 지난 여행보다 어떤지를 이야기해요. 나중에, 대학 가면, 취직하면, 돈을 벌면, 집을 사면 어떻게 할 거라고 말하죠.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불행하게 사는 것도, 과거에 매여 오늘을 보지 못하는  것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요? 10대 청소년에게도, 20대 청년에게도, 40대 중년에게도, 70대 노인에게도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때이고 가장 행복해야 할 시간이에요. 오늘의 불행이 내일의 행복을 보장할지 장담할 순 없지만 오늘을 행복하게 산 사람의 내일이 불행하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동일, 『라틴어수업』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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