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라 Mar 25. 2024

이러려고 돈 버는 거지

휴직하고 세계여행 01

휴직을 결심했다. 그것도 아내와 함께. 둘 다 일 년이나 수입이 없으면 타격이 상당할 텐데 고민하던 찰나 마음에서 누군가 외쳤다. 이러려고 돈 버는 거 아냐?’



어렸을 때부터 지도 보는 걸 좋아했다. 새 교과서를 받으면 사회과부도나 지리부도를 열심히 봤다. 맨 뒤에 있는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을 외우고 다니며 친구와 누가 더 많이 아나 내기를 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루지야, 네팔, 덴마크로 이어지는 가나다 순 나라 이름이 떠오른다. 그게 왜 그리 재밌었을까.


사회생물학의 창시자 에드워드 윌슨은 어떻게 생태 연구에 대한 열정을 유지하냐는 질문에  누구나 곤충을 좋아하는 시기가 있는데 자신은 다 커서도 그 시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답했단다. 그 말이 퍽 멋있었다. 누구나 지도를 보며 미지의 세계를 꿈꾸던 시기가 있었을 텐데 나도 아직 그 시기가 다하지 않은 건 아닐까.  


어린 시절에는 부루마블이 또 그렇게 재밌었다. 우리 동년배는 다들 부루마블이 세계지리, 세계사 공부 아니었나. 이 역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을까. ‘날아라 슈퍼보드’나 ‘원피스’ 같은 만화는 새로운 곳에서 고난을 겪지만 이를 이겨낸다는 늘 같은 포맷이었는데도 다음 화가 항상 기다려졌다. 나중에 이를 ‘모험과 추구의 플롯’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굳이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런 여행기들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는 걸.


중학교 때 보아의 '아틀란티스 소녀'가 나왔는데 첫 소절부터 두근두근 뛰었다. '저 먼바다 끝엔 뭐가 있을까' 맑고 서늘한 목소리. 바다 끝이라니, 하늘과 맞닿은 거기에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고? 제목도 어쩜 이리 잘 어울리나. 본 적 없는 세상,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 언젠가 나도 꼭 여행을 떠나야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언제나 소녀였던 보아도 이제 대선배 가수가 되었고, 나도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 취업을 하고 일을 하고 차를 샀다. 돈을 벌고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일을 하고 돈을 벌었다. ‘슈퍼보드’는 역사 속으로 묻힌 지 오래고, ‘원피스’의 루피는 무려 20년 넘게 여행 중이지만 나의 일상은 똑같았다. 내 꿈은 어디로 갔지? 


딱 한 번 꿈에 도전한 적은 있었다. 그것도 무려 15년 전 일이긴 하다. 방위산업체에서 군 복무를 한 나는 매달 최저임금 수준의 돈을 벌었고, 전역하면 세계여행을 떠나고자 했다. 그때도 꿈만 커서 유럽까지 자전거로 여행해 보자는 마음이었고, 스마트폰도 없을 때라 관련 커뮤니티만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사람들의 여행기를 읽으며 내가 다 설렜다. 하지만 전역 후에도 세계여행은 떠날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막상 실천하려 하니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저 무모하고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여행이 활성화되지도 않아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포기한 나는 야학 교사를 하고,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남들과 같은 고시생이 되어 경쟁의 챗바퀴에서 허우적거리다 겨우 교사가 되었다.


좋은 교사라 자부하며 살았다. 그런데 10년이 넘게 지나니 아이들이 변한 건지 초심을 잃은 건지 생각이 좀 달라졌다. 아이들은 항상 옳다는 생각이 흐트러졌다. 무조건 아이들 편에 서자는 다짐이 위험하게 보였다. 잠깐 쉴 때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한다. 꿈을 함께 이야기하는 직업의 특권이다. 대부분 버킷리스트 1순위는 무엇일까? 여러분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바로 ‘세계여행’. 나도 그랬다. 그리고 이제 때가 온 것 같다.


교사에게는 자율연수 휴직이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휴직하고 자율적으로 뭔가 배우라는 제도인데 급여는 나오지 않는다. 재직기간 10년이 넘으면 사용할 수 있고, 퇴직 때까지 딱 한 번 쓸 수 있다. 1학기 또는 2학기를 쓸 수 있으며 올해 쓰고, 내년에 또 쓰는 식으로 나누어 쓸 수 없다. 즉 평생에 한 번 있는 기회라는 것. 마침 작년으로 아내가 딱 10년이 되었다. 역시 나처럼 지친 아내가 먼저 제안을 했다. 자율연수휴직을 쓰고 여행을 떠나는 동료가 있다고. 우리도 해보자고.(나중에 알았지만 그가 해외에서 머문 시간은 극히 적었고, 대부분 우리나라에 있었다한다...) 부부 동반 휴직 후 세계여행이라니. 이것도 마음이 맞아야 할 수 있는 건데. 참고로 아내는 대단한 P이고, 나는 다소 J여서 내가 하나부터 아홉 개 반 정도까지 계획을 짜야했다.(반 개는 아내의 몫으로 두자.) 아내의 오더가 떨어지면 실무적인 일을 처리해야 하는 셈. 그렇게 우리의 세계여행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