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하고 세계여행03
"행복하다"
호텔 옥상에 있는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아내가 한 말이었다. 몇년을 살면서 "행복해?" 물었을 때도 즉답을 안 하던 정직한 그녀는 아무 저항 없이 행복을 고백했다. 내가 물을 필요 없이 일을 잠시 멈추고 경치 좋은 곳에 와서 따뜻한 햇살을 쬐어주면 되는 거였구나. 맛있는 거 입에 넣어주고. 그런데 이 행복함이 곧 괴로움으로 변할 줄은 몰랐다.
언제 돌아올지 모를 긴 여행이 될 것이다. 첫 번째 여행지는 베트남의 나짱. 로마자 표기를 그대로 발음해 ‘나트랑’이라고도 알려졌지만 현지 사람들은 ‘나짱’이라 부른다. 대표적인 휴양지로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호텔에 짐을 풀고 나니 새벽 4시가 다 되었다. 첫 숙소 침대에 눕는 순간을 오랫동안 그려왔다. 일 년 넘게 준비한 여행, 기대의 나날들이었지만 그만큼 긴장도 컸던 시간이었다. 정말 할 수 있을까, 스스로 설득하고 다짐한 날들이 많았다. 어쨌든, 이제 진짜 오고 말았다.
베트남에서는 4성급 호텔도 3만 원대에 묵을 수 있다. 조식도 나오고 수영장과 운동시설도 있는. 베트남에서 시작하는 이유다. 저렴한 물가와 신선한 과일, 그리고 따가운 햇살. 아, 그런데 이 햇살이 문제였다.
단기 여행자가 아니니 촉박한 일정에 쫓기며 돌아다니지 않기로 했다. 느긋하게 호텔에 머물며, 가고 싶은 곳을 마실 삼아 다녀오려 했다. 호텔 옥상에는 수영장이 있었고, 아침 식사를 마친 나와 아내는 이곳에서 두 시간여 수영을 했다. 사실 난 수영을 할 줄 모른다. 배운 적도 없고, 물에 뜰 줄도 모른다. 수영을 할 줄 알면 여행의 질이 달라진다는 말을 들었고, 예전부터 수영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기에 여기서 어떻게든 연습해볼 생각이었다. 물에 뜨는 것, 앞으로 나아가는 법부터 천천히 익혔다. 당연하게 여겼던 호흡부터 집중하고, 온몸에 힘을 빼고 감각에 귀 기울였다. 무엇을 하든 귀에 이어폰을 끼고 멀티태스킹으로 살아가는 시대에 반하는 시간. 은유 작가도 글쓰기와 수영을 자주 비교하곤 하는데, 나도 이를 삶의 태도와 잘 엮어서 글로 써봐야지 하는 생각까지 했다. 아내는 얼굴에만 선크림을 발랐고, 나는 바르지도 않았다. 잠깐 놀다 들어올 요량으로 또, 수영장 물이 오염되면 어쩌나 하는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었다. 수영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는데도 작열감이 가시지 않았다. 작열감. 말 그대로 지글지글 타는 듯한 뜨거움이다. 알로에를 사다 발랐는데도 그때 뿐이었다. 이제 우리의 호텔 입원기가 시작된다.
첫날에는 온몸이 빨갛고 뜨거운 느낌이 가득했다. 찬물로 씻어내고, 알로에를 발라도 가시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문을 연 약국에 가 화상연고를 달라고 했더니 ‘비아핀’이라는 큼직한 연고를 준다. 17만 동으로 퍽 비싸게 샀는데 찾아보니 꽤나 유명한 의약품이다. 우리나라보다 베트남에서 싸게 살 수 있어 필수 쇼핑리스트에까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비싸게 산 것 같다. 아내와 함께 한 통을 다 발랐다.
자고 일어나니 통증이 더 심해진다. 계획대로면 이제 시내 관광도 가고, 유명한 사원에도 가보려 했는데 옷을 입고 벗기도 힘들다. 부피가 작고 금방 마르는 건식 수건을 몇 개 챙겨왔는데 거기에 물을 묻혀 몸에 붙였다. 알로에를 바르고 비아핀을 발랐다. 밥은 먹어야 했기에 아침에 조식을 먹으러 다녀오고, 해가 진 뒤 근처 식당에서 밥만 먹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약국마다 들러 비아핀 가격을 물었고, 10만 5천 동으로 가장 저렴한 가격에 몇 개 더 사 왔다.
며칠이 지나니 이제 물집이 생기고, 또 자는 동안 등의 물집이 터져 통증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움직일 때마다 아프다. 아내는 이제 거의 나아가는데 나는 무슨 객기였는지 웃통을 다 벗고 수영을 해 더 심하다. 매일 수영을 하고,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겠다는 계획이 우습다. 물집이 생기면 감염의 위험이 있어 절대 터뜨리지 말라고 하는데, 등 전체의 물집이라 자면서 터지고 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근처 병원을 찾았다. 오자마자 타국에서 병원 신세라니. 병원은 규모가 제법 컸고,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접수와 수납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서로 안되는 영어로 어찌어찌 진료를 받았다. 외국 관광객이 많은 도시라 그런지 의사는 바로 구글 번역기를 켜서 증상을 묻는다. 드레싱이나 소독이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항생제와 진통제를 처방해 주겠단다. 연고는 없냐고 물으니, 크림까지 처방해준다. 수납처 맞은편에 있는 약제실에서 한참 기다려 약을 받았다. 항생제와 진통제 그리고 비아핀 두 개.
나짱에는 5일 정도를 머물고 달랏으로 출발하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옷을 입을 수도 가방을 멜 수도 없었다. 이틀을 더 연장했다. 아무래도 시간밖에는 약이 없을 것 같았다. 그나마 우리가 여행 중이라 다행이지 일을 하는 일상이었다면 더 힘들고, 회복도 늦었을 것이다. 여행의 시작부터 아주 고생이다. 동남아 땡볕에 선크림도 안 바르고 맨몸으로 수영을 하다니. 특히 물놀이는 물방울이 돋보기 작용을 해 자외선에 더 노출된다. 스스로가 멍청해서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결국 우리는 일주일간 호텔에서 입원 치료를 하는 호사스러운 경험만 해야 했다. 뽀나가르 사원도, 나짱 대성당도 가보지 못했다. 우리의 활동반경은 숙소 주변 1km 정도에 그쳤다. 나짱 관광은 아주 편리해 보인다. 웬만한 식당에는 한국 메뉴판이 있고, 점원들이 한국어도 곧잘 한다. 물가는 몹시 저렴하다. 여행 난이도가 가장 낮은 지역을 선택하더니 스스로 미션을 주는 건가. 긴 여행의 예방주사를 세게 맞은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많은 이들이 건강과 안전을 당부했고, 우리 또한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 여행의 제일 목적이라며, 아프지 않기를 다짐했었다. 시작부터 순탄치 않은 여행, 아무튼 몸은 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