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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라 Apr 01. 2024

곰스크로 가는 길

휴직하고 세계여행 02

이제 다음주면 떠난다. 여행을 준비한지는 1년이 넘었다. 그중 대부분은 마음을 먹고 또 용기를 내는 시간이었고, 여행이 임박한 지금은 밀도있게 실제적인 준비를 하고 있다. 사실 여행을 준비하는 건 꽤나 피곤한 일이다. 일정을 짜야하고, 항공권과 숙소를 예약해야하고, 필요한 물품을 사야한다. 내 유튜브는 세계 각국의 여행기로 가득 차 있고, 그 지역에서 꼭 가보아야하는 곳과 꼭 먹어야하는 음식들이 넘쳐 흐른다. 동시에 여행지 소매치기, 캐리어 분실, 사건사고, 관광객 바가지가 함께 소개된다. 벌써 피곤하고 지치는 느낌이다.

아내와 나는 기껏해야 5박 6일이 가장 긴 여행이었다. 1년 여행을 이야기하니 주변 여행 고수들이 하나같이 놀란다. 그러게 어쩌자고 이렇게 무모한 용기를 낸건가. 여행지도 사람 사는 곳이고 거기 가면 다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긴 여행을 해본 적 없는 우리는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산다. 며칠째 인터넷으로 가방과 옷과 신발을 산다. 다이소만 세네번 갔고, 이마트도 여러번 갔다.

사실 챙기는 물건이 다가 아니다. 내시경을 포함한 건강검진을 받았고, A형간염, 장티푸스, 황열병, 파상풍 예방접종을 맞았다. 자동차 책임보험을 알아봤고, 기여금과 건강보험료 중지를 알아보고 처리했으며, 해외 문자수신을 위한 휴대폰 알뜰폰 요금제를 알아봤다. 필요한 체크카드와 신용카드를 발급받았고, 장기 여행자보험에 가입했으며, 해외여행에 필요한 어플을 깔고 회원가입을 했다.

현재 나트랑, 푸꾸옥, 쿠알라룸푸르, 발리, 콜롬보 항공권을 예매했는데 계속해서 최적의 금액과 시간대를 계산하고 선택해야한다. 숙소는 사진과 후기, 위치와 가격을 보고 계속해서 비교하고 또 상상해보아야 한다. 이런 과정들이 굉장히 피로한 것이다. 더구나 여행이란 모름지기 일상이 지치고 힘들 때 여기를 벗어나고픈 욕망에서 그 설렘과 만족이 오는 것인데, 휴직 중인 나는 현재의 일상이 몹시 평화롭고 행복하다. 건강검진을 했더니 스트레스 지수가 낮게 나왔다. 일하는 중이었다면 꽤 높았겠지.

바닷가로 이사온지 한달 정도 되었다. 우리집에서는 수평선까지 바다가 훤히 보인다. 조금 일찍 일어나면 일출을 볼 수 있고, 매일 먼바다까지 일을 나가는 배들이 보인다. 창을 열면 바닷바람이 들고, 파도의 색깔로 그날의 바람과 날씨까지 알 수있다. 먼 바다에서 치는 파도와 가까운 곳의 파도가 다르다. 바다 색도 날씨에 따라 달라진다.


바다를 끼고 걷다보면 둘레가 6키로쯤 되는 근사한 호수가 나타난다. 꽃나무가 호수를 두르고 있어 해마다 벚꽃축제를 하고 자전거 타는 사람들, 산책이나 달리기 하는 사람들이 평화로유 곳이다.
집에만 있어도 좋다. 아늑한 침대와 멋진 뷰, 닌텐도, 만화책, 보드게임. 아직 읽지않은 수많은 책들. 그리고 이 모든 안락함은 일을 멈추고 쉰다는 것으로 완성된다. 이쯤에서 고민하게 된다. 이 좋은 곳을 두고 험난한 고행을 꼭 떠나야하나.



생각해보니 이건 <곰스크로 가는 길>의 간이역과 비슷한 것 같다. 프린츠 오르트만의 소설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는 '곰스크'를 동경하고 거기에 가는 것을 인생 목표로 삼은 남자가 나온다.
그는 결혼해 아내와 함께 곰스크로 떠나지만 간이역에 내렸다가 기차를 놓친다. 기차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르고 전 기차표는 소용 없어 다시 구매해야한다. 역에 마련된 숙소와 식당에서 부부는 일하게 되고 기차가 다시 오지만 아내는 떠나는 대신 이곳에 머물기를 바란다. 부부는 아이를 낳고 집을 구해 그곳에 적응해 살지만 남자는 마음 속에 곰스크를 품은 채 아쉬워한다. 어느날 젊은 시절 그와 비슷한 처지였지만 이제는 적응하여 늙어버린 노인이 나타난다.

"사람이 원한 것이 곧 그의 운명이고, 운명은 곧 그 사람이 원한 것입니다. 당신은 곰스크로 가는 것을 포기했고 여기 이 작은 마을에 눌러앉아 부인과 아이와 정원이 딸린 조그만 집을 얻었어요. 당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기차가 이곳에 정착했던 바로 그 때 당신은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기차를 놓치지도 않았을 거에요. 그 모든 순간마다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건 나쁜 삶이 아닙니다.

의미없는 삶이 아니에요. 당신은 아직 그걸 몰라요. 당신은 이것이 당신의 운명이라는 생각에 맞서 들고 일어나죠.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반항했어요. 하지만 이제 알지요. 내가 원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만족하게 되었어요."

교생실습으로 시험을 치르지 못하는 학생에게 번역과제로 제시했다는 작품. 그리고 그 대학생의 번역이 전설처럼 전해오다 정식 출판되었다는 태생부터 낭만적인 소설이다.

남자는 가족과 일상의 행복을 얻었지만 곰스크로 가는 것을 포기했다. 나는 세계여행이라는 오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많이 준비했고 계획해왔다. 그리고 이제 꿈이 현실이 될 시간이다. 꿈을 이루는 순간은 막상 겁나고 회피하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겠지. 더구나 나는 곰스크로 가기를 거부하는 소설 속 아내와 달리 먼저 세계여행을 가자하는 그녀가 있으니.

나의 곰스크는 어디일까. 이스탄불의 보스포르스 해협, 우유니 소금사막, 룩소르 신전.. 일단 지금은 첫 여행지 나트랑이다. 나트랑 호텔에 도착해 침대에 누우면 이제 여행의 시절이 시작되는구나 체감될 것 같다. 여행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들이 모여 오늘과 내일을 결정한다.


 초보여행자인 나는 그래서 멀리멀리 계획하며 불안해하지만 막상 내던져지면 순간의 선택들로 살아갈 것이다. 그게 모여 인생에 다시 없을 경험과 추억이 될 것이다. 사람이 원한 것이 곧 그의 운명이라는 노인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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