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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봄바람 맞으며 선암사를 걷다

전라도 순천 조계산 나들이

by Wynn

반복되는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을 때 나는 조용한 산속의 사찰을 찾는다. 보통은 서울 근교에 있는 절을 찾지만, 여유가 있다면 시간을 내서 남도의 산으로 향한다.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는 3월의 어느 날, 나는 오래 전 아내와 함께 찾았던 순천의 조계산을 찾았다. 10여년 전 떠났던 순천 기차여행. 순천만 갈대와 꼬막 미식 여행을 떠났지만 우리 맘에 오래 기억된 장소는 바로 조계산의 조용한 절들이었다. 조계산 서쪽에 있는 송광사와 동쪽에 있는 선암사가 바로 그곳이었다. 그 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조용한 산책길을 즐기기 위해 순천의 선암사로 다시 향했다.

서울에서 순천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많아야 1년에 한 번 정도. 자동차를 타고 5시간은 열심히 달려야 도착하는 곳. 주말 정체를 피하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러서 남도의 봄을 찾아나섰다.
선암사 입구에 도착하니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각. 주차를 하고 조용한 산책로를 걸었다. 다행히 무료로 입장할 수 있어서 부담이 적었다. 매표소를 지나서 사찰로 향하는 길은 긴 비포장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만 3월 초라서 그런지 아직은 앙상한 겨울 풍경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계곡물은 차가운 얼음을 뚫고 봄맞을 준비를 하면서 맑은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분명 봄이 오는, 설레는 3월이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선암사의 상징인 승선교가 나왔다. 승선교는 신선이 되어 오른다는 다리로, 이 다리를 건너면 속세에서 벗어나 신선의 세상으로 간다고 한다. 둥근 아치 형상으로 놓인 승선교는 보물 400호로 선암사 내부의 삼층 석탑과 함께 가장 인기있는 선암사의 대표 건축물이다. 승선교 뒤로는 신선들이 머문다는 강선루도 보였다. 승선교와 강선루, 선암사 계곡을 담기 위해 이른 아침이었지만 사진을 찍는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계곡에서 승선교와 강선루를 향해 사진을 찍으면 인생 한 컷을 건질 수 있다고 한다. 이곳은 풍경이 아름다워서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도 인기가 높다고.

강선루를 지나서 선암사 본사찰로 다시 걸었다. 웅장한 계곡물 소리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너무나 맑은 조계산의 물줄기,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맑아졌다. 아침 산의 신선한 공기와 짹짹이는 새소리는 또 하나의 힐링을 우리 가족들에게 선물해 주었다.

드디어 선암사 입구에 다다랐다. 저멀리 일주문이 보였다.

순천 선암사는 백제 성왕 때 창건된 오래된 사찰이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중창되어 지금의 선암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절 서쪽에 높고 면이 평평한 큰 돌이 있는데, 사람들은 옛 선인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고 하여 ‘선암(仙岩)’이라고 불렀다고. 하지만 조선 시대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다수의 건물이 불탔고, 이후에도 여순사건과 6.25 전쟁 등으로 100여 동의 건물 다수가 소실되어서 지금은 20동의 건물만 남았다고 한다. 잦은 화재 때문인지 선암사에는 석등이 없다. 대신 주위에는 불을 끄기 위한 비상용(?) 연못들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그 오랜 시간 역경을 이겨내고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명사찰로 남아있는 선암사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선암사의 정문인 일주문. 근데 다른 절과는 다르게 사천왕문이 없었다. 이유를 찾아보니 조계산의 주봉인 장군봉이 절을 지켜준다고 믿어서 사천왕 조각이 없다고 한다. 특별한 일주문을 지나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몇 개의 계단을 오르니 웅장한 대웅전 건물이 나왔다. 대웅전 앞에서 당당히 우리를 맞이해주는 동,서 방향으로 놓여있는 2개의 3층 석탑. 이 석탑은 국가 보물 395호로 신라시대의 석탑이라고 전해진다. 석탑 위와 아래의 비율이 적절하고 우아하며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자세히 보니 경주 불국사에서 봤던 석가탑과 유사한 느낌이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선암사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동백, 벚나무, 철쭉 등 꽃나무가 가득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살포시 꽃망울을 터뜨릴려고 하는 홍매화. 선암사 꽃나무 가운데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것이 홍매화라고 하는데, 서서히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웅전 지나 각황전과 무우전이 있는 종정원 돌담을 따라 걸으니 홍매화 20여 그루가 서서히 개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찰을 둘러보다가 선암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나무가 있었다. ‘선암매’라 불리는 고목. 천연기념물이라고 한다. 자세히 내용을 샆펴보니 천불전 와송과 함께 심어진 것으로 약 600년된 고목으로, 봄이 되면 선암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나무라고. 그 오랜 시간 선암사와 함께한 그 고목이 이 절의 진정한 주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그 나무 앞에 몇 개의 의자가 있는데 눈을 감고 선암사의 느낌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휴식 장소였다. 잠시 가족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면서 조계산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선암사의 매혹적인 자태에 반하여, 봄을 재촉하는 홍매화와 백매화에 취해, 그리고 조계산의 풍광에 반헤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과거와 현재가 담긴 건물 하나 하나를 둘러보면서 선암사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행복했다. 자연에서 즐기는 진정한 힐링의 시간이었다. 소나무 앞의 넒은 광장에 앉아서 조용한 사찰을 느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조계산의 정기를 느낄 수 있었다. 삭막해진 내 삶이 충전되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암사에서 들린 곳은 바로 뒷간. 선암사의 화장실이었다. 1920년대에 지어진 건물로 아직도 재래식으로 사용되는 화장실이다. 아래가 뻥 뚫려서 사용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익숙치 않은 어린 아이들은 사용이 힘들 듯 했다. 그리고 또 하나 더운 여름에는 냄새때문에 운영이 만만치 않을 듯한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거대한 '공동형 푸세식(?) 화장실'. 색다른 경험이었다.

선암사에서의 특별한 여행을 마치고 우리 가족은 다시 주차장으로 향했다. 내려오는 길에서 봄을 재촉하는 3월의 따사로운 햇살에 눈이 부셨다. 이제 진정한 봄이 오는 듯 했다. 지난 겨울 나를 힘들게 했던 일들. 어수선한 우리 사회 이야기와 만만치 않았던 회사 생활. 이제는 그 긴 터널 속에서 빠져나와서 2025년 새로운 봄을 마주할 때가 되었다. 그 시작을 남도의 선암사에서 시작하는 듯 했다.

내려오는 발걸음이 한 컷 가벼웠다. 나는 룰루랄라 노래를 불렀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남도의 봄바람이 산뜻하게 느껴졌다. 천여년 동안 불타고 부서지고를 반복했지만 지금도 당당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선암사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삶이 힘들더라도 결코 포기하고 지쳐서는 안된다는 것. 선암사의 선암매처럼 그렇게 버티고 이겨내면 그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 남도의 아름다운 산사 선암사가 내게 선물해준 것들이다. 이젠 완연한 봄이다. 희망의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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