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수학여행 화투의 추억
"못 먹어도 고! 이번에 쓰리고야"
명절이 돼서 가족친지들이 모이면 삼촌들은 천 원짜리 지폐와 백 원짜리 동전을 앞에 쌓아놓고 밤새 고스톱을 즐겼다. 나는 삼촌들 옆에서 담배 심부름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화투라는 것을 배웠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몇 번을 지켜보니 금방 원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묘하게 끌리는 재미도 있었다. 가끔씩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친구집에 놀러 갔을 때 부모님이 없으면 나와 친구들은 몰래몰래 고스톱을 치기도 했다.
시나브로 향상된 나의 화투 실력은 고등학교 1학년 가을 수학여행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다. 설악산에서 맞이하는 수학여행 첫 날밤, 방마다 비밀스러운 프로젝트들이 진행되었다. 불을 끄고 몰래 술을 마시는 방이 있었고, 카드 게임을 하거나 화투를 치는 도박방도 있었다. 우리 방은 화투방이었다. 조용히 선생님의 눈길을 피해 가며 몇 명이 모여서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사실 나는 반장이었기에 처음에는 하지 말라고 살짝 친구들을 다그치기도 했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을 리는 없었다. 그 녀석들 또한 나와 친한 친구들이었기에 옆에서 방관하며 지켜보기. 나름 재미있어 보였다. 근데 잠시 후에 한 녀석이 피곤하다며 잠을 자러 사라졌다. 친구들은 멤버가 부족하다며 나도 참여하라는 했다. 살짝 갈등이 되었지만 수학여행을 즐기자는 생각에 그 판의 멤버가 되었다. 천천히 패를 섞고 7장씩 화투를 돌렸다. 내 패를 보는데 완전 대박. 시작과 동시에 홍단과 청단! 완벽한 승리였다.
그때부터 손맛이 붙었는지 패가 남달랐다. 좋은 패가 계속 나에게 들어왔다. 계속 점수를 내는 것은 물론이고, 패를 먹다가 뻑(?)을 해도 모두가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정말 운이 좋았다. 한 번은 쓰리고를 하면서 20점을 냈다. 상대편은 피박까지 쓰며 무려 80점이라는 어마어마한 점수가 나왔던 것. 친구들 주머니 속의 용돈과 동전은 어느 순간 내 앞에 다 놓여있던 것이었다. 그날 나는 12전 12승. 한 번도 지지 않았다. 모두가 나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놀라울 정도였다.
마지막에 한 친구는 "반장 너 타짜 아니야? 완전 고수인데. 나 올인이야"라고 말하자 옆의 친구도 "네가 계속 이기니까 재미없다! 그만하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 또한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듯하여 친구들에게 딴 돈 절반을 나눠주고 고스톱을 마무리했다. 그날 나는 완전한 타짜였다. 내 인생 최고의 연승이었다. 다행히 수학여행 첫날에는 선생님들이 방순찰을 돌지 않아서 우리가 화투를 친 것은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문제는 수학여행이 끝나고 생겼다. 학교에서 판치기(책 위에 동전을 놓고 모두 같은 그림이 나오면 이기는 도박)가 유행이었고, 쉬는 시간에 우리 반 대부분이 그 놀이를 하고 있었다. 수학여행에서 선생님께 걸리지 않았다는 자만심 때문인지 반 전체가 판치기 놀이에 빠져있었다. 그것을 우연히 지나던 담임선생님이 목격한 것이었다.
그날 오후 담임 선생님의 수업 시간. 선생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담임선생님은 우리 반 모두에게 각자 책걸상을 들고 바로 옆의 작은 운동장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하셨다. 운동장에서 수학 수업을 한 것이었다. 수업 시작과 동시에 선생님은 판치기 도박을 한 사람들은 모두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서로 눈치를 보면서 우리 반 대부분이 앞으로 나왔다. 서너 명을 빼고 전부였던 듯했다. 선생님은 나온 사람 모두에게 "엎드려"라고 소리치시더니 긴 밀대걸레 몽둥이로 사랑의 매(?)를 강하게 때려주셨다. 40여 명이 각자 엉덩이 5대씩을 맞았고 나와 부반장은 그것을 말리지 않고 동조했다는 명목으로 그 2배인 10대를 맞았다. 내 생애 가장 아픈 체벌이었다. 그날 밀대 걸레 몇 개가 부러져버릴 정도였다. 선생님이 그렇게 화가 난 것도 처음 봤다. 며칠 동안 엉덩이가 퉁퉁 부어올랐다. 걷기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
어찌 되었건 나에게는 큰 반성의 계기가 되었다. 리더라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이 그 엄청난 매가 나에게 큰 약이 된 것. 그런 충격 요법이 없었다면 학창 시절 달콤한 도박의 유혹을 벗어나기 힘들었을 듯하다는 생각. 문득 그 시절 열정 가득했던 담임 선생님이 지금도 잘 지내실 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