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어' 펜팔코너에 실린 나의 주소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 여동생이 '주니어'라는 청소년 잡지 하나를 집에 가지고 왔다. 잘 나가는 연예인들 사진들과 인터뷰 기사가 가득한 잡지. 그 잡지는 사춘기 아이들이 연예계를 알아가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나는 우연히 책자에 꽂혀있던 우편엽서를 꺼내서 이런저런 내용을 적어서 다시 우편함에 넣었다. 펜팔을 원한다는 내용도 적은 듯했다.
한 달정도 지났을까? 동생이 다시 가져온 1993년 2월 주니어 잡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펜팔코너를 들쳐보았는데 펜팔코너 한 구석에 내 이름과 주소가 실려있었다. 그곳에는 수십 명의 이름이 있었지만 남자 이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틀 후부터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우체부 아저씨가 10여 통이 넘는 편지를 전달해 주신 것. 다음 날은 20통, 셋째 날은 거의 30통의 편지가 쏟아졌다. 1주일 정도 지났을 때 무려 100여 통의 펜팔 편지가 도착했다. 내 생애 이렇게 많은 여학생들의 편지를 받아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첫날에 받는 편지는 하나하나 답장을 써주었는데, 그 이후에 온 편지들은 물리적으로 답장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이메일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가 손으로 답장을 해야만 했다. 정말 잠을 줄여가면서 열심히 답장을 해주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빨리 적어도 한계가 있었기에 몇몇 정성스럽게 적어준 편지들은 학교 친구들에게 건네서 그 친구들이 답장을 해주기도 했다. 그 중 몇 명은 좋은 인연으로 발전한 친구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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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정도가 지났을까? 늦은 밤에 부산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내가 답장을 해준 친구의 아버지였는데 며칠 전 그 친구가 가출을 했다는 것. 책장 위에 내 편지가 있어서 전화번호부를 찾아서 연락을 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받은 편지를 찾다보니 그 친구의 이름이 보였다. 상당히 짧은 편지여서 간단히 답장을 보냈던 것이 전부였다. 혹시 연락이 있었냐는 물음에 나는 전혀 없었다고 얘기했다. 그 아버지는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우리 부모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적당히 편지를 하라고 나를 다그치셨다.
몇 주가 지나서 서서히 편지를 하는 친구들은 줄어들었고 불과 서너 명만이 나와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였다
몇몇 친구들은 편지를 하면서 선물도 보내왔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부담이 된다는 생각. 혹시 부산 그 아이처럼 가출해서 만나자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결국 2학년 개학을 하던 3월 초. 1달 동안 이어왔던 펜팔을 모두 접기로 다짐했다. 편지 쓰기도 쉽지 않았고 아직까지 편지를 통해서 여자 친구 사귈 생각도 없었다. 계속 연락을 주고받던 서너명의 친구들에게 아쉬운 작별 편지를 보냈다. 대부분은 답장이 없었지만 단 한 명이 내게 다시 편지를 보내왔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순천에 사는 친구였다. 편지를 꺼내보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는 내용과 함께 편지지가 눈물로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내가 뭔가 상처를 준 기분. 나 또한 맘이 편하지 않았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지만 나 또한 어쩔 수 없었다.
그날 나는 내가 받은 모든 편지와 선물을 한 곳에 모아서 안방의 아궁이로 가져갔다. 불을 지핀 후에 장작 사이로 그 편지들을 하나하나 집어넣었다.
편지들은 불길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한 달간 마치 유명스타가 된 기분이었고, 행복했다는 생각. 멍하니 불꽃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정리하던 사춘기 시골 소년의 모습이 기억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