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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의 신

호주 워킹홀리데이의 추억 ①

by Wynn

2002년 12월. 태어나서 처음으로 국제선 비행기에 올랐다. 일본 나리타를 경유해서 호주 케언즈로 향하는 긴 비행. 저녁 9시 나리타 공항을 출발한 콴타스 항공 비행기는 뜨거운 적도를 지나서 남반구의 호주 땅으로 향했다. 가진 돈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현지에서 바로 일을 구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어떻게 1년을 버틸 수 있을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케언즈 한인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작은 카페로 향했다. 그분의 도움으로 1주에 80 불하는 작은 숙소를 구했다. 침대 하나와 작은 탁자가 전부인 방. 그곳에 나는 짐을 풀었다. 잠시 눈을 붙인 후에 나는 케언즈 도심으로 나갔다. 열대 햇살이 가득한 케언즈 거리를 걸으며 느꼈던 이국적인 설렘. 비로소 나는 한국을 떠나서 외국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장 은행에 들러서 계좌를 만들고 저렴한 핸드폰 하나를 임대했다. 간단히 푸드 코트에 들려서 늦은 점심도 즐겼다. 그날 하루는 나는 케언즈 도심과 바닷가를 걸으며 호주에서의 첫날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나는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미리 한국에서 준비해 온 영문 이력서 가지고 여기저기를 찾았다. 동양인이 운영하는 작은 기념품 가게도 들렸고, 대형 마트도 찾아갔지만 한두 달 단기적으로 일을 하고 떠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가진 사람을 위한 일자리는 전혀 없었다. 영어 실력도 문제였다. 능숙한 영어 실력이 아니었기에 실제로 내가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민 끝에 먼저 영어 공부를 하기로 했다. 30만 원 정도를 내고 오전 수업만 하는 4주짜리 단기 어학원을 등록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짧은 영어 실력으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식당에서의 kitchen hand. 설거지와 주방 보조 일이었다. 우선 학원을 다닐 동안은 한국 식당에서 저녁 2시간 정도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지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적은 급여와 주인 어르신의 잦은 욕설은 참기 쉽지 않았다. 며칠을 채우지 못하고 첫 아르바이트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몇 주 후에 다시 찾은 일자리는 대형 일본 회전 초밥집과 4성급 호텔의 뷔페. 하루에 7~8시간 동안 식당 설거지를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아무 말 없이 음식물 찌꺼기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손으로 기계로 접시를 닦고 또 닦았다. 그러다 지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으면 저 멀리 누군가가 내게 외쳤다. 관리자였다.


"Keep going on, keep going on!"


계속 접시를 닦으라고 나를 다그쳤다. 눈치를 보면도 또 닦고 닦았다. 설거지용 호스의 수압이 강해서 음식물 찌꺼기가 얼굴이 튀는 경우도 있었고 안경에 남은 음식이나 초밥용 밥풀 붙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볼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식사 시간이면 뷔페에서 남은 음식을 눈치 보며 가지고 왔다. 어두운 주방의 구석에 앉아서 홀로 식사를 하곤 했다. 휴식 시간이 있긴 했지만 그리 길지 않았다. 그 시간이 지나면 1분의 여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한국에 들어와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아픔을 나는 호주의 식당 한구석에서 느낄 수 있었다.


눈물이 나왔다. 서럽고 또 서러웠다.

지금 내 모습이 짜증 났고 여기까지 와서 무엇을 하나 있나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학교 친구들은 여기저기로 어학연수를 간다고 자랑하듯 얘기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니할 수가 없었다. 어렵사리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고 와서 일해서 버티는 것이 최선이었다.


일주일 정도 하루 종일 설거지를 계속하면서 마음 한 켠으로 자괴감이 다시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10일 정도 일하고 나는 다시 식당을 그만두었다. 며칠 정도 호주여행 디니며 마음을 추슬렀다. 언제나 그렇듯 돈이 문제였다. 잔고가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다. 다시 도시를 옮겨서 식당일 또 시작했다. 중국 식당부터 한국 레스토랑까지 나는 또 주방보조원이 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설거지의 신이 되었다. 미치도록 설거지를 잘하는 신과 같은 존재. 설거지의 전문가가 된 것이었다. 일하고 여행 다니고 또 일하고 여행 다니면서 나는 계획했던 1년을 무사히 마무리했다.


호주에서의 워킹홀리데이 1년.

나는 설거지의 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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