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최초로 했던 알바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2011년의 겨울, 친구의 손을 잡고 따라간 던킨도너츠에서였다. 처음 접해보는 포스 기는 왜인지 한없이 어렵기만 했고, 평소에 사 먹기만 했던 도넛들의 가격과 이름+온갖 다양한 음료들의 레시피들을 외우는 일 또한 아직 고등학교 졸업식을 하지 않은 열아홉 살 중졸에게는 나름 혹독한 시련이었다.
동그란 도넛들의 이름을 열심히 외워대며 열심히 일하고 나니 내 손에도 처음으로 알바비라는 것이 쥐어졌다. 학생 때 돈을 벌었던 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고등학교 때 백일장을 열심히 다니며 벌어온 상금이 200만 원 정도 되었지만 순진했던 나는 그때마다 족족, 벌어온 돈을 엄마의 손에 순순히 넘기고야 말았던 것이다.
성인이 되고 나자 더 이상 부모에게 손을 벌리면 안 된다는 압박이 컸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집에서 삼 남매 중 둘째로 자랐고, 내 욕구를 표현하는 건 곧 민폐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라왔기 때문에 약간의 돈을 쓰는 일에도 벌벌 떨었다. 그런 내게 '돈을 번다'는 것은 또 다른 짜릿하고 새로운 세계였다.
문학구장에서 스탭으로 일하기도 하고
동대문에 가서 팔찌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취재비와 장학금을 받기 위해 학교 신문사에 지원했고 기자가 되었다. 신문사 회의에 간답시고 당시 과 OT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은 신입생 41명 중에 나 한 명뿐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프로야구 팬이어서 스포츠신문의 기자가 되어 야구판을 취재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딱히 기자가 되고 싶어서 신문사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게는 죄책감 없이 쓸 수 없는 돈이 필요했다. 따로 알바를 하지 않아도 취재비로 생활비를 벌 수 있었고, 장학금을 받아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무언가를 집요하게 파고들거나 논쟁을 벌이는 것을 싫어하고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나에게 2년 동안의 신문사 생활은 꽤나 고역이었다. 기사 쓰는 능력은 인정받아 보도부장까지 맡을 수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는 도저히 맞지 않는 옷이었다. 3년 차에 접어들던 해 강제로 후보가 된 편집장 선거 투표에서 편집장에 당선되던 날, 나는 도망치듯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학보사 시절의 기자수첩과 카메라.
그러고 나니 다시 먹고 살 일이 막막해졌다. 교회를 다니니 주말 알바도 애매하고, 평일에는 먼 학교를 통학하는 것과 동아리 모임 때문에 매일 새벽같이 나가서 자정이나 되어야 들어오는데. 대체 무슨 알바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별수 없이 재택 아르바이트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페이는 정말 짜고, 홍보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해 알바몬 페이지를 무려 20페이지까지 넘겼다. 딱 20페이지까지만 보고 꺼야지! 하던 찰나, 월급이 100만 원인 곳이 있었다. 세상에, 월급이 100만 원이라고? 뭔 일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이력서를 넣었고, 우연찮게도 연락이 왔다.
당시 홍보팀 팀장에게 면접을 봤다. 그는 내게 혹시 바이럴 마케팅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해본 적은 없지만 시켜 주시면 열심히 하겠다는 전형적인 답변을 남겼다. 업무는 간단했다. 화장품 리뷰 쓰기. 실제로 해 보니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고, 회사에서도 만족해하면서 다음 주에 곧바로 프리랜서 계약서를 썼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이 일을 무려 3년 반이나 하게 될 줄은....
2년 정도는 괜찮았는데, 그 이후가 되니 몇 달마다 주기적으로 슬럼프가 왔다. 만날 쓰는 거 똑같이 쓰니까 너-무 지겨웠다. 하지만 이보다 나은 재택 아르바이트를 찾지 못했기에, 또 어차피 대학 졸업하고 취업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만두게 될 것이었으므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 달 두 달 계속한 것이, 엄마가 아프게 되고 취업이 무기한 지연되면서 그만 둘 희망이 없어졌다. 회사에서는 아쉽지 않을 만큼 대우해 주었지만, 일감이 업데이트되는 저녁 6시부터 찾아오는 일에 대한 압박이 너무 컸다. 더 이상 홍보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알바하기 싫어!!!! 를 외치며 책상 앞에서 언니에게 절규하는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충동적으로 가족들에게 알바를 그만두겠노라 선언했다. 이번이 아니면 도저히 그만두지 못하겠다 싶어서 심호흡을 두 번 정도 하고 실장님께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 실장님은 잘 알겠다고, 하지만 그만둔다고 하지는 말라고, 언제든 다시 일하고 싶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다시 연락 준다면 언제든 1순위로 가장 먼저 일하게 해 주겠다고. 그 말만으로도 내가 이곳에서 그동안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얼굴 보고 하는 일이 아니기에 더욱 함부로 하거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3년 반 동안 지각 한 번 없이 이 악물고 일했던 시간들,
그래서 참 감사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3년 전, 그러니까 아직 취업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시절. 발병 3년 차에 접어든 엄마와 24시간 함께하며 백수 생활을 보내던 나는 이 반복되는 무력함과 무료함, 그리고 취업 준비에 대한 초조함이 뒤섞인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내린 결론은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출판사가 원하는 인재가 되자!'는 것이었다. 진정한 출판 인재라면 그래픽 프로그램 정도는 다뤄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3개월 동안 학원에 다니며 배운 포토샵과 일러스트, 인디자인으로 컴퓨터 그래픽스 운용기능사와 전자출판 기능사를 땄다. 더 딸 자격증은 없나 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딸 만한 자격증을 검색해 보던 중, 여성이 소자본으로 창업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아이템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순간 번쩍 하고 머리에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가만, 취업이 어렵다면 창업을 하면 되는 거잖아?
그 날부터 정말 하루 종일 내가 할 수 있을 만한 창업 아이템들을 찾아 헤맸다. 손재주가 제법 있다는 말은 종종 들었지만 업으로 삼을 수준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해왔기에 처음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그러다가 운명처럼 나와 딱 맞는 아이템을 만나게 되었고(자세히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일), 휠체어를 탄 엄마의 곁에서 매일 밤을 새워 연습을 시작했다. 블로그 포스팅 아르바이트는 그만두었지만 낮에는 출판사를 통해 재택으로 할 수 있는 교정교열 외주를 받아 일했고, 그 돈으로 재료를 사서 작품을 만들었다.
오랜 간병 생활과 취업이 불가능한 삶에 대한 좌절에 빠져 있던 나에게 창업이라는 꿈은 구원과도 같았다. 나는 내가 선천적으로 재능이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한계를 노력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정말 열심히 연습했다. 엄마의 병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고 어차피 앞으로도 취업은 어려울 것 같으니 이 일이 아니라면 안된다는 각오로 배수진을 친 셈이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만든 작품들을 묵묵히 인스타그램에 올리다 보니 조금씩 팔로워가 늘어났고 주문 문의도 심심치 않게 들어왔다. 간신히 확신이 생겼을 때쯤 블로그 포스팅과 교정교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간신히 모은 돈을 보증금 삼아 조그만 공방을 얻었다. 사랑하는 지인들이 오픈 선물이랍시고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좀처럼 살 것이 없었다. 공방으로 이사를 하던 날 가장 친한 언니가 조그만 삼십오만 원짜리 냉장고를 보내주었다. 딱 이맘때쯤 추웠던 겨울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두툼한 패딩을 껴입고 목장갑을 낀 채로, 차갑고 매끈한 냉장고 모서리를 어루만지다 문득 고마움과 울컥한 마음이 올라와서 기어이 엉엉 울어버렸다.
가족들과 지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혼자라면 절대 해낼 수 없었을 꿈이었다.
손님들은 나를 주로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쥐콩만한 공방인데 사장은 웬 사장이야.. 하고 적응이 되지 않던 저 단어도 시간이 지나니 차차 적응이 되어간다.
아마도 내 공방의 인스타그램 계정만 보는 분들은 내가 이런 삶을 살고 있는지 꿈에도 모를 거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주변 지인들에게도 나의 창업 소식은 꽤나 화제였고, 멀쩡히 할 수 있었던(?) 취업을 포기하고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난 이 시대의 진정한 욜로(YOLO)족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몇몇에게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조금씩 씁쓸해진다.
원데이 클래스를 오는 수강생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질문은 "정말 부러워요. 어린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행복한 일을 재밌게 하고 계시네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종종 이렇게 능청스레 웃으며 이야기한다.
"아 근데 사실... 제가 본업은 간병인이고, 부업이 사장이라서요. 공방은뒷전이에요."
공방을 오픈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난 요즘은 주문제작이 많이 늘어나 분주하고 감사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세상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만약 내가 여전히 취업하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내며 좌절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면 내심 아연해진다. 사실 그런 상황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와 같은 주 간병인이 간병만 하기에도 힘든데 뭔가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나의 작은 사업을 꾸려가면서도 한계는 있다. 주문제작이 들어오는 대로 모두 받을 수 있는 다른 곳과는 달리 나의 상황을 고려해 개수를 정해두고, 그 개수를 초과한 문의가 들어오면 아쉽고 죄송하지만 거절한다. 덕분에 사업이 좀처럼 번창하지 않고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으니 속상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나의 일에 집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엄마에게 소홀해진다는 것을 몇 번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엄마를 돌보는 것이 내게는 언제나 가장 먼저다.
사실 공방을 처음 시작하던 시기에도 엄마는 내 취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는 것처럼 속상해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 엄마라는 역린을 끌어안고 가야 하기 때문에 온전히 사업에 올인할 수도 없는 내가 창업을 한다는 게 엄마에게도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모든 것이 비교적 안정된 요즘, 엄마는 이제 더 이상 내 걱정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자책하거나 미안해하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엄마는 내 공방의 임원직을 맡고 있는데 직책은 이사님.
우리 이사님께서는 침대에 누운 채 다양한 업무(?)를 소화하고 있다. 주문 현황 점검, 이달의 수입 조사, 신제품 가격 책정 논의, 작품 디자인에 대한 평가와 개선방안 회의 등등. 공방에서 작업한 작품을 가져와 엄마에게 보여줄 때면 엄마는 반대쪽으로 누워 있다가도 냉큼 자세를 바꿔달라고 해서 동그랗게 뜬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디자인을 검토한다. 오늘 만든 작품의 경우에는 엄마가 말없이 골똘히 쳐다만 보고 있길래 약간 긴장을 했다. 뚫어져라 작품을 관찰하던 엄마가 이윽고 자음판으로 세 글자를 적었다.
잘 했 어.
가끔씩 엄마는 정말 사랑스럽다.
혹시라도 이제 갓 간병을 시작하는 분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환자의 상태가 괜찮을 때, 환자의 곁에서도 연습이 가능한 기술을 배우거나 필요한 공부를 시작하기를 권해드리고 싶다. 상태가 악화될수록 뭔가를 배우고 연습하기란 결코 쉽지 않고, 또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간병 생활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가 손쉽게 절망으로 둔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간병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좋지만, 만약 경주마처럼 간병에만 올인한 시간들이 끝나고 환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아무것도 남겨진 것이 없는 듯한 허탈함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환자가 회복되거나 세상을 떠나더라도 남겨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간병을 해야 하는 상황 가운데 있다고 해서 그저 좌절하고 손을 놓고 있다기보다는 아주 작은 자기 계발이나 소박한 꿈이라도 가지는 것이 때론 이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된다.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최대한 꿈을 꾸며 살아야 한다. 나를 포기하지 않게 만든 건 팔 할이 엄마의 슬픔이었다. 반드시 조금이라도 이 분야에서 살아남아 엄마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던 내 눈물겨웠던 각오의 밤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우리 때문에 자책하는 환자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살아남고, 또 반드시 행복해져야 할 의무가 있다.
종종 일이 힘들고 슬럼프가 오고 불평불만이 쌓일 때면, 힘겹게 지나온 지난날들을 떠올린다. 이런 악조건이 가득한 상황에서도 보람되고 행복한 일을 하며 미래를 꿈꿔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잊지 않고 그저 감사한 마음만으로 매일을 살아가려고 한다. 무엇보다 엄마가 더 이상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을 수 있게 된 이 상황이 정말 다행스럽고 감사하다. 만약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면 이 일도 시작하지 않았을 테니, 지금의 내 직업과 삶은 엄마의 아픔이 내게 준 선물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