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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펭귄 Nov 28. 2020

꿈에도 몰랐지, 내가 취업도 연애도 못하리라곤

엄마, 그래도 난 괜찮아




  때는 바야흐로 몇 년 전, 대학교 졸업반이던 시절이었다. 남사친 A와 오랜만에 만나 저녁을 먹고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 갔다. 각자 원하는 음료를 시켜 홀짝이고, 포크로 부지런히 케이크 가장자리부터 공략해 나갔다. 우리의 대화는 늘 그렇듯 또래의 관심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란히 졸업을 앞둔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물론 취업이었다. 너는 자격증 뭐뭐 땄어? 거기 지원해 볼 거야? 등등.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평소와는 다른 주제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맞다. 나, 지난주에 어떤 분 소개받았어."

  "오 대박, 왠열? 그래서 잘됐어? 뭐야? 어떤 분인데?"

  "아니, 그냥 뭔가 좀 안 맞아서... 결국엔 잘 안 됐어. 쉽지 않더라고. 아, 연애하고 싶기는 한데."


  소개팅 자리에 긴장한 채로 앉아 있는 A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처음부터 친구로 만나서 그런 건가, 누군가를 이성으로 대하는 A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게 새삼 낯설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A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곤 생각했었지, 그러니까 여태 친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흠, 그동안 생각을 아예 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먼저 꺼내본 적은 없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담 혹시... 진짜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나는 별로야?

  하마터면 불쑥 입 밖으로 나올 뻔한 문장을 화들짝 놀라 다시 집어넣었다. 이걸 한번 얘기해 봐, 말아? 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갑자기 내가 속해 있는 현실이 실감이 났다. A는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은 알지만, 이 정도로 아픈지는 모른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 자세를 변경해 줘야 하고, 기저귀를 갈아주어야 하며,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엄마의 주 간병인은 바로 나다. 일주일에 한 번 외출하는 것도 어려운 나. 오늘도 큰 마음을 먹고 집안일을 죄다 해놓고 나서야 겨우 나왔다. 그래서 A와 만나게 되면, 그래서 뭐? 우리가 만날 수는 있고?

  잠시 달떴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입술 끝에 걸려 있던 말을 언제 그랬냐는 듯 욱여넣는 대신 빙긋 웃으며 포크로 남아 있던 케이크를 헤집었다. 카페를 나와 헤어지는 길에 A는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좀 어떠셔?"

  "아, 엄마... 그냥 뭐, 똑같지."

  "에고, 그렇구나. 곧 좋아지실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A의 해맑은 덕담에, 나는 왠지 조금 서러워졌다.


 


         

  대학교 선배인 B와 만나서 동기들의 모임 장소에 함께 가기로 했다. 그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졸업 전 마지막 학기였던 4학년 2학기에 소위 썸 타던 사이. 부쩍 싸늘해진 날씨에 꽁꽁 언 손을 녹여가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때,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내려간 차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고 있는 B가 보였다. 엥, B는 차가 없는데 어떻게 된 거지? 당황스러웠지만 우선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제야 차 문에 쓰여 있는 쏘카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 렌터카였구나. 그런데 이 시간대의 교통체증을 생각하면 대중교통이 빠를 텐데... 왜 굳이?


  모임 장소까지 가는 데는 예상대로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다행히도 무사히 도착했고, 모임은 아주 즐거웠지만 모임 장소와 집이 멀었기에 열 시 반이 되자 막차를 타기 위해 신데렐라처럼 일어나야 했다. 방해되지 않게 조심조심 짐을 싸고 일어나려는데 B가 가방을 챙겨 들고 나를 따라 나왔다.


  "뭐야, 오빠도 벌써 가게? 좀 더 놀다 가지 왜?"

  "집까지 태워줄게."

  "엥, 데려다준다고? 이 시간에? 우리 집까지?"

  "어, 그러려고 빌린 차야."


  그러려고 빌린 차라는 게 무슨 말인지 잠깐 의미를 더듬어보는 동안 B가 주차장으로 나를 인도했다. B가 야심 차게 빌린 렌터카는 차가 많지 않아 비교적 한산한, 자정이 가까워오는 새벽의 거리를 지나 우리 집으로 향했다. 덕분에 집으로 가는 길은 편안하고 즐거웠으며 수다가 끊이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아쉬워하며 슬슬 내릴 준비를 하려던 그때, B는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짐작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네가 좋은데. 네 생각은 어때?"      

  "어... 나?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의 질문에 냉큼 외롭다고 대답하기만 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내일부터 1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늘 해오던 생각들이 으레 그렇듯 익숙하게 말문을 가로막았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B가 내민 손이 결코 가볍게 내민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더욱 그랬다.

  나라고 왜 다른 사람들처럼 연애가 하고 싶고, 결혼이 하고 싶지 않겠는가. 특히나 아기를 정말 좋아해서, 사랑스러운 아기를 낳아 키우고 싶다. 그래서 예전에는 좋은 사람을 만난다면 오히려 빨리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내 꿈이었다.


  B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민하려는 순간 침대에 누워 있는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중증 환자와 함께하는 삶이란 정말이지 불확실한 것 투성이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아마도 취업하기 어려울 것임에 틀림없었고,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거나 돈을 모으기는커녕 재택알바로 번 쥐꼬리만 한 돈마저 엄마의 병원비를 대는 데 급급할 것이 뻔했다. 설령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우리가 만약 오래 만난다 해도 언제 결혼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으며, 24시간 보호자가 필요한 엄마를 위해서는 집에서 5분 거리 마트에 가는 것도 큰 마음을 먹어야 했다.


  엄마를 돌보는 데 너무 많은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늘 지쳐 잠들기 일쑤인 데다 불침번을 위해 저녁 10시면 꼬박꼬박 잠에 드는 나. 그런 내가 감히 이 손을 붙잡아도 될까? 사람을 만나거나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이런 나의 모든 상황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그건... 상대에게 너무 못할 짓이 아닐까.


  이 모든 생각의 끝에서 나는, 정말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거절을 했다.


  언젠가는 B에게 꼭 사과를 건네고 싶다(?).





  대학에 다니면서부터는 종종 회사원이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 있었다. 김사원, 김대리, 나중에는 김 과장이 된 나의 모습! 약속시간에 늦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데 출근길이 다소 피곤하겠군. 우선 너무 누추해 보이면 안 된다는 핑계로 한 달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새 옷을 살 것이다. 대학생일 때 주야장천 들고 다니던 에코백은 다 버리고 가죽으로 된 가방도 몇 개 마련해야지, 너무 저렴하지 않은 것으로다가.

  아! 나는 발이 시린 걸 싫어하니까 두툼한 양털이 들어찬 슬리퍼와 극세사로 된 담요, 최애 캐릭터가 그려진 달력, 그리고 졸지 않기 위한 달달한 주전부리들을 가져다 놔야겠다. 원래 생각했던 출판업계의 분위기를 고려하면 어느 정도의 야근은 각오해야지만 그래도 되도록이면 너무 야근이 잦은 곳이 아니면 좋을 텐데. 대충 이런 상상들이었다.


  회사에 잘 적응하거나 일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어디에 가던지 맡은 바 최선을 다할 자신은 있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온갖 알바란 알바는 다 해가며 한 푼의 용돈도 받지 않으며 대학을 다녔고, 어디를 가든지 나름대로 성실하고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온 내가 아니던가.

  그런 내가, 동아리 생활에 푹 빠져 너무 열심히 하느라고 정작 취업 준비는 다소 늦게 시작했다. 사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엄마가 아프기 시작했기 때문에 취업이 당장의 얘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 탓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친구 중 누구는 모 프로그램의 막내 작가가 되었다더라, 누구는 파주로 갔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종종 들려왔고 내 가장 친한 동기는 디지털단지의 조그만 출판사에 들어가 막내 사원이 되었다.


  처음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어차피 빠른 년생이어서 남들보다 1년을 더 벌었다는 안도감도 있었고 한 번도 안 해 본 나의 업무 능력에 대해(?) 이유 없는 자부심도 있었으니까. 졸업 후 첫 해를 그렇게 막연한 자신감과 함께 흘려보내고 나자,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엄마와 가족들에게 '나 올해까지만 엄마 돌보고 내년엔 취업한다'라고 말했다. 정년퇴직한 아빠에게 엄마를 맡기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느리고 답답한 스타일의 아빠는 예민한 성격의 엄마와 트러블이 잦았고, 간병의 난이도는 점점 더 높아지고 할 일이 많아져 누구 한 사람에게 떠맡기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언니는 업무 특성상 회사에 출근해야만 하는 직업을 가지고 았었고, 세 살 아래의 남동생은 허리를 많이 다친 데다 세 번째 수능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취업을 포기하는 것.


  하루하루가 너무 극한의 순간들로 흘러가고 엄마는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하고, 언제 입원할지도 모르는데 대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취업을 할 수 있을까. 졸업한 친구들은 하나 둘 취업하고 결혼하는데 나는 계속해서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사회 초년생이 되어야 할 이 중요한 시기에 제자리걸음은커녕 뒷걸음질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마주하는 건 퍽 괴로웠다. 나름 최선을 다해 꾸려온 내 인생이, 이렇게 전개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그러나 취업을 못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건 엄마의 깊은 좌절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나름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둘째 딸의 백수 생활이 길어질수록 엄마는 심히 우울해했다. 자신 때문에 네가 취업도 결혼도 못한다며 빨리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만 반복했다. 그런 엄마를 보는 내 마음도 안쓰럽고 미안했다.


  사실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면 어디라도 취업을 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엄마였다. 엄마를 제외하고 가족이 네 명이나 있지만 엄마는 언니와 나,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많이 찾았다. 나에 대한 엄마의 의존도가 너무 높다 보니 차마 그런 엄마를 뿌리치고 취업전선에 덤벼들 수는 없었다. 나의 존재가 너무 절실해서 발목을 붙잡고는 있지만- 그런 자신을 끊임없이 원망하고 또 한없이 미안해했던 가엾은 나의 엄마.

 그런 엄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언제나 나는 괜찮다고 말하는 것, 손을 잡고 웃어주는 것뿐이었다.

 괜찮아, 나는 진짜 괜찮아.


  다른 건 몰라도- 이 말만큼은 늘 진심이었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엄마는 늘 이렇게 말한다.





  초등학교 때 즐겨 들었던, 내가 아직도 좋아하는 동요 중에

  엄마에게 불러주고 싶은 노래가 있다.



  도리 도리 도리 도리 감자도리

  빨강망토 작은 눈에 감자도리

  고구마가 되고 싶어 꿈을 꾼다

  모험을 떠난다


  마법 보석 찾아가는 감자도리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가슴이 콩닥콩닥


  하지만 널 위해라면 할 수가 있어,

  모든 두려움 이겨낼 수 있어

  어려움이란 당연한 걸

  내가 꾼 꿈인 걸-

  정말로


  내일이면 난 소원 이뤄

  고구마 돼 있을 걸

  기다려 


  <감자도리송>

  

고구마가 될 그날까지, 엄마랑 함께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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