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이 필 무렵 퇴원한 엄마는 마비되었던 장이 회복되어서인지 눈에 띄게 식사량이 늘었다. 도통 먹지 못하던 엄마가 하모닐란(유동식)을 잘 받아먹으니 주는 우리도 신이 났다. 기분 탓이겠지만 살이 아주 조금 찌고 얼굴이 좋아진 것 같기도 했다.
루게릭병이 진행되는 과정의 특징은 한번 나빠지고 나면 한동안은 일정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다가 일정 시기가 되면 며칠 전부터 서서히 컨디션이 나빠지거나 숨쉬기 힘들어하는 등의 증세가 나타나다가 갑자기 또 어딘가가 확 나빠지기를 반복한다. 직전 입원에서 폐렴과 기흉, 장 마비 등의 증세를 모두 치료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엄마는 5개월이라는 제법 긴 시간 동안 잘 먹고 견디며 투병을 이어갔다.
그러던 8월의 어느 날, 며칠 전부터 엄마가 숨을 쉬기가 힘들다며 호흡곤란 증세를 호소했다. 설마 이러다 다시 입원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지만 엄마의 손발을 주물러 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데다 인공호흡기에 산소발생기까지 기계를 두 개나 달고 있는 환자를 병원에 데려가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었고, 병원에 가게 되면 온갖 검사에 필수적으로 입원을 해야 하는데 입원을 하고 나면 집에서 간병을 하는 것보다 열 배쯤은 더 힘겨운 하루를 보내야 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입원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5개월 동안은 그런 적이 없었는데 부쩍 숨쉬기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며 다시 입원할 날이 머지않았구나 하고 직감했다. 겨우겨우 호흡하던 엄마가 자음판으로 힘겹게 한 문장을 말했다.
- '이제 가는가 보다.'
이 문장이 완성되는 순간 가슴속에서 울컥하고 감정이 치밀어, 돌아누운 엄마의 등 뒤에서 손으로 입을 막고 한참을 울었다. 그날 새벽부터 엄마는 열이 나기 시작했고, 우리는 5개월 만에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코로나 2차 대유행이 갓 시작된 데다 전공의 파업이 일어났던 여름, 병원에 가는 일은 너무도 어려웠다. 경기도에서 발생한 어느 환자를 받아줄 수 있는 병원 응급실이 없어 충청도까지 갔지만 결국 병원 문도 밟아보지 못하고 숨졌다는 기사는 이제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었다. 지난 봄 입원했던 병원 응급실에 전화를 걸어 갈 수 있는지 물어보았지만 남아 있는 병상이 없다는 답변이 되돌아왔다. 새벽 4시 30분. 병원에 가고 싶은 엄마는 열이 올라 붉게 달뜬 얼굴로, 전화를 걸고 있는 나를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받아주는 병원이 없고 거절뿐이라 갈 수 있는 병원을 찾아 헤매었다. 전화를 걸었다 끊었다를 반복했다. 응급실에서 거절받는 일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집에서 갈 수 있는 모든 중대형 병원의 응급실에 전화를 걸어 루게릭 환자인데 상태가 이러하니 제발 받아달라고 사정했고, 다행히 그중 한 병원에서 간신히 우리를 받아주었다. 호흡곤란에 열까지 코로나 증세와 같았기에 독방 같은 작은 방에 엄마와 함께 격리되었다. 수액을 맞고 나니 다행히 열이 내려갔고 호흡도 조금 나아져 코로나 검사 결과가 나온 후 사설 응급차를 불러 집으로 돌아왔다. 입원해서 상태를 지켜보고 싶었지만 병상이 없어 입원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간신히 병원 문턱을 밟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컨디션은 며칠 만에 다시 악화되었다. 일반 환자처럼 걸어서 갈 수도 없고 무조건 응급실을 거치거나 입원을 해야 하는데, 엄마가 아픈 것도 스트레스지만 아파도 병원에 가기 힘들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다행히 며칠 뒤에 시도했을 때는 극적으로 자리가 있어 입원할 수 있었고, 코로나 검사를 다시 받고 1인실에 하루를 격리된 후에야 입원병동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세 번째 입원이 시작되었다.
8월은 퍽 혹독한 달이었다.
얼마 전 새로운 직장을 구해 출근한 아빠 대신 언니와 둘이서 바리바리 짐을 싸고, 입원 수속을 하고, 병동으로 올라갔다. 병원에 올 때마다 늘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기는데, 이번에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병원의 면회가 전원 금지되어 출입을 통제함에 따라 보호자는 한 명만 있을 수 있고, 교대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다시 말해 한 명만 지정해서 병원에서 24시간 내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였고, 그건 딱 봐도 내가 되어야 했다.
언니와 서로의 얼굴을 멍청하게 바라봤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럼 어떻게 해..? 얼빠진 목소리로 언니가 물었다. 나는 보호자 침대에 앉아 신속하게 머리를 굴렸다. 저녁 8시에는 절대 취소할 수 없는 내일의 주문제작 일정과 다음 주의 주문건들, 씻는 것과 갈아입을 옷과 때워야 할 끼니 같은 것들. 또다시 모조리 취소해야 할 것들을 비롯해-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사정들이 거칠게 머릿속을 헤집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음에도 내 붕괴된 멘탈이 훤히 보였는지, 내일 출근해야 하는 언니가 초조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봤다. 만약에 내가 회사원이었어도 어차피 회사 그만뒀어야겠는데, 라는 생각에 자조 섞인 웃음이 났다. 우리는 한 달에 300만 원이 넘는 간병인을 쓸 수도 없었고, 설령 돈이 있다고 해도 루게릭병 환자를 케어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원래 병원에 상주하는 전문 간병인도 아닌 내가 병원에서 숙식을 해결하기에는 너무 극한의 길이 예상되었다고나 할까.
- 간호사님, 그런데요... 환자 특성상 엄마 케어가 가능한 간병인을 구하기도 불가능하고, 만약에 교대를 못하면 저는 일을 그만둬야 하는데요.
울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간신히 말했다. 5분이라도 잘못되면 바로 사망할 수도 있는 기계를 두 개나 달고 있고 자음판으로 소통해야 해서 남들 다 쓰는 간병인조차 쓸 수 없는 기가 막힌 상황을 생각하니 서러운 마음에 마스크 속으로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심각해진 코로나 상황을 생각하면 원칙을 지켜야 하는 것은 알지만, 이 상황이 너무 기가 막혔다. 다행히도 우리의 사정을 아는 병동 측에서 언니랑만 잠깐 교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언니가 퇴근 후 잠깐 있어 주는 19시에서 24시를 제외한- 하루 24시간 중에서 19시간.
내가 병원에 있는 시간이다.
퇴근한 언니와 교대하고 나면 바로 공방에 가서 다음날 주문건을 만들어놓고 집에 돌아와 한두 시간 정도 간신히 눈을 붙인 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자정 12시, 누군가에겐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
새로운 하루를 위해 성큼성큼
다시 어둠 속으로-
입원하고 나서 처음 맞이하는 주말, 언니 찬스를 이용해 간병복 쇼핑을 떠났다. 사실 하루 종일 병원에 있으니 너무너무 초췌한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옷은 매일매일 갈아입어야 하니까! 엄마가 아픈 뒤로 최근 몇 년간은 밖에 나가거나 사람을 만날 일이 없으니 옷을 산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입을 만한 옷이라곤 고작 두세 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런 옷
간병복(?)으로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았던 건 모름지기 프로 간병러를 위한 간병복이 갖춰야 할 몇 가지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1. 오랜 시간 입고 있어야 하니 편한 게 최우선, 꼭 맞기보다 넉넉한 사이즈
2. 복도 부지런히 지나다닐 때 너무 튀어도 좀 그러니까 색은 어둑어둑 무난하게
3. 기저귀를 갈거나 몸을 닦아줄 때 걸리적거리니 나풀거리는 소매는 금물
4. 너무 덥거나 추운 소재는 안됨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간병복을 찾기란 쉽지 않았지만 철저한 검증 끝에 간병복 쇼핑을 무사히 마쳤다. 앞으로 매일매일 돌려 입어야지!
라이언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집에 온갖 라이언 굿즈가 20마리쯤 있는데 라이언이 박힌 옷이 있는 걸 보고 흥분해서 어머 이건 사야 해...! 하는 마음으로 입어보지도 않은 채 집어 들고 계산대로 걸어가다가 남성용인 걸 알고 눈물을 머금은 채 내려놓았다. 제발 여성용도 만들어 주세요...
조금 잠잠했던 편두통이 재발했다. 잘 벼린 칼끝 같은 통증이 1분에 두 번씩 머릿속을 깊숙하게 찌르고 사라진다.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내가 필요한 엄마의 부름에 1초 만에 벌떡 일어나 그녀의 곁으로 간다. 루게릭 환자의 간병을 혼자 한다는 건 곧 결코 잠들 수 없다는 이야기와 같다.
너무 오랫동안 쉬지 못한 삭신이 비명을 지른다. 이대로는 도무지 하루를 버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약국에 가서 무작정 제일 잘 드는 것으로 달라고 한 진통제를 추천받았다. 까만 콩을 닮은 이 알갱이 두 개를 삼키며 간신히 하루를 버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