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병명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세불명의 호흡곤란과 요로감염이었다. 24시간 기저귀를 차고 살다 보니 회음부가 오염에 노출되기 쉬워서 5년 차에는 유독 요로감염이 자주 찾아왔다. 요로감염은 사망에 이르거나 할 만큼 치명적인 병은 아니었지만 호흡곤란과 고열을 동반했기 때문에, 면역력이 워낙 약해져 있는 엄마에게는 가볍게 지나가는 감기조차 한없이 무서운 병일 수밖에 없었다.
겨울에 입원했을 때 폐렴 때문에 고생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폐렴이 재발한 건 아닐까 하고 두려워했었는데 다행히 폐렴이 아니라는 이야기에 한숨을 돌렸다. 요로감염을 고치기 위해서 엄마는 수액을 투여받기 시작했다. 이대로 항생제가 엄마의 몸속에서 열심히 일해서 소변이 깨끗해질 때까지, 우리는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루게릭 환자를 병원에서 돌보는 일이란 집에서보다 훨씬 고되다. 가뜩이나 코로나 시국이기 때문에 교대를 할 수도 없으니 하던 일이 올스탑 되고 잠도 잘 수 없고, 혈압을 재고 주사를 놓기 위해 수시로 드나드는 간호사들과 환자의 부름 때문에 한시도 편하게 있을 수 없다. 게다가 한시도 마스크를 벗지 못하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 화장실에 갔을 때나 가끔 마스크를 벗고 숨을 몰아쉬곤 했다.
상황이 이런 데다 불편한 소변줄을 끼고 있어야 하고, 주사를 계속해서 맞아야 하니 컨디션만 조금 괜찮아지면 엄마는 늘 의사 선생님께 퇴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졸랐다. 입원 기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피폐해져 가는 내 모습을 보는 것도 엄마에게는 괴로운 일이었을 터다. 정말 친절하고 상냥하시지만 걱정이 많으신 주치의 선생님은 조금만 호전되면 냅다 퇴원시켜 달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엄마 때문에 늘 난감해하셨다. 상냥하게 웃으며 조금만 더 지켜봅시다~ 하고 달래시는 모습은 주치의 선생님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조금만 더 지켜보고 요로감염만 나아지면 이번에도 늘 그렇듯 퇴원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항생제와 수액을 맞으며 퇴원을 하게 되기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호흡곤란을 호소했다. 황급히 혈압을 재고 네빌라이저를 했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엄마의 의식이 서서히 흐려지는 상태를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봐야 했다. 위기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엄마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엄마, 엄마! 하고 크게 불러야 겨우 힘겹게 눈을 뜨고, 이윽고 다시 감아버렸다. 엄마가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못할까 봐, 혹시나 이게 엄마에게 하는 나의 마지막 말이 될까 봐 틈틈이 반응이 없는 엄마의 귀에 대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의식을 잃은 지 둘째 날이 되던 밤, 삐빅- 삐빅 하고 이상한 소리가 새벽의 적막을 뚫고 들려왔다. 산소포화도와 심박을 체크해 주는 기계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불안하게 주위를 살피던 내 시선이 기계 위에 멍청하게 잠시 머물렀다. 100이어야 정상이고 90 아래로 떨어지면 안 되는 포화도 수치가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황급히 간호사실로 달려가 의료진을 불러왔다. 혈압을 재고 동맥에서 피를 뽑아 검사를 하고, 주입할 수 있는 산소 수치를 최대로 올렸지만 산소포화도는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기어이 24까지 떨어진 숫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차디찬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내 손의 온기로 데워 보다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병실을 하염없이 걸어 다녔다. 24까지 떨어진 산소포화도를 바라보던 당직 의사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러 이야기를 꺼냈다.
- 보호자님,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족분들께 연락해서 최대한 빨리 오라고 하세요.
- 선생님, 그럼... 저 산소가 0이 되면 죽는 건가요?
-... 네, 그렇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말없이 줄줄 우는 나를 무거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당직 의사가 떠나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집에 전화를 해 자고 있는 가족들을 깨웠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나와 교대해서 병원을 떠난 언니와 동생이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다. 다들 망연자실해 있는 동안 산소 수치가 다행히도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고, 천천히 다시 90까지 올라오면서 언니와 동생은 자리를 떠도 되는지 반신반의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아주 긴 새벽이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가장 먼저 엄마에게 달려오신 주치의 선생님이 인공호흡기 설정을 더 세게 조정했다. 여전히 떨어졌다 올라갔다를 반복하던 엄마의 산소포화도는 그 이후로 조금씩 안정기에 접어들어 95 이상을 유지했고, 엄마는 반나절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지옥 같은 이틀을 보내고 엄마가 생사의 문턱에서 다시 돌아온 뒤에야 우리는 결심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정말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으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사랑하기로.
2
설사가 뭐길래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요로감염이 나아져서 퇴원하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조금 있으면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이었고 정말이지 추석을 병원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자는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위기를 넘기고 나자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좋은 균도 나쁜 균도 모두 없애 버리는 항생제 부작용으로 인해 엄마에게 무시무시한 장염이 찾아온 것이다. 다행히 복통은 없었지만, 밥을 먹는 족족 설사를 하는 바람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기저귀를 갈아야 했다. 하루에 한 번만 해도 진이 빠지는 일을 한 시간 간격으로 하려니 엄마도 나도 완전히 탈진해 버렸다. 방석이며 이불, 환자복이 계속해서 더러워져서 갈아입을 옷과 이불을 얻으러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장염 치료를 위해서는 무려 최소 15일이나 항생제를 투여해야 한다는 폭탄 같은 처방을 받았다. 15일이면 추석을 훨씬 넘기는 날짜였고, 당장 내일이라도 퇴원할 것처럼 한껏 부풀었던 마음은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불쾌한 펑 소리를 내며 터져버렸다.
청천벽력 같은 의사 선생님의 처방 앞에서는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했지만, 그녀가 병실 커튼을 젖히고 나가고 나니 너무 큰 실망감에 도무지 표정 관리가 안되기 시작했다. 추석 전에는 퇴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마음껏 텔레비전도 보고 집 밥도 먹고 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뭐람. 긴 연휴를 설사와 함께 병동에서 보낼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가뜩이나 하루 종일 계속되는 설사로 미안한 마음에 내 눈치만 보던 엄마는 회진이 끝난 후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을 보고는 안절부절못하다 자음판으로 이것저것 말하며 어떻게든 내 기분을 돌려보려 애쓰기 시작했다.
- 저녁에 맛있는 거 먹어.
"아 됐어, 먹긴 뭘 먹어."
- 공방 주문받아.
"지금 잠도 못 자서 죽을 것 같은데 주문을 받으라고? 나더러 수면 부족으로 죽으란 소리야?"
날 선 목소리로 죄 없는 엄마에게 짜증을 냈다. 기분이 너무 좋지 않으니 엄마에게도 말이 곱게 나올 리 없었고 평소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던 팔도 거칠게 툭 내려놓았다. 엄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게 이 타이밍에 장염은 왜 걸려가지고. 눈을 흘기며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 내가 미쳤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엄마, 미안해... 내가 오늘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 하루 종일 너무 힘들었는데 입원이 더 길어진다니까 너무 짜증 나서, 그래서 그랬어. 제일 힘든 사람은 엄만데 내가 뭐라고... 진짜 미안해 엄마. 내가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그래. 미안해 엄마, 용서해 줘."
엄마는 토라진 눈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 엄마... 제발 용서해 줘. 내가 진짜 미안해... 용서해 줄 거지? 응?"
울먹이는 목소리에 엄마가 한참만에 용서해 주겠다는 뜻으로 눈을 깜박였다.
매일 결심해도 성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아픈 것만으로도 충분히 서럽고 한없이 소중하게 대해도 모자란 엄마에게 나는 얼마나 못되게 군 걸까. 아무리 노력해도 내 안에 사랑이 아직 부족함을 느낀다. 후회로 가득한 무거운 마음으로 병실 문을 나선 그 날 이후로 엄마에게 단 한 번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앞으로 간병을 하면서 힘들거나 짜증 나는 날이 온다면 그 죄스러웠던 날의 저녁을 떠올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