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고지순 Jan 24. 2018

'갑을'이 아닌 '병'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어도 친구가 되기는 힘들다. 학교를 함께 다닌 옛 친구들과는 마음속 깊은 얘기도 스스럼없이 꺼내는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친한 사람들과의 허물 없는 대화는 쉽지 않다. 게다가 고객사의 담당자라면 비즈니스 이상의 관계가 되기는 더욱 어렵다. 하지만 친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아래의 글은 몇 명 안 되는 필자의 사회 친구에 대한 얘기다.


Y 사의 채용담당자 J 대리와의 첫 만남은 8 년 전이었다. 첫인상은 여느 기업의 채용담당자처럼 탐색과 의심의 눈초리로 일관했다. 과연 앞에 있는 헤드헌터가 본인의 숙제를 잘 해결해 줄 수 있는 든든한 파트너가 될지, 아니면 수많이 스쳐 지나간 일인 중에 한 명이 될지를 판단하는 순간이다. 과거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지만 헤드헌터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은 '전문성'이다. 초기에 인맥을 통해서 첫 오더(order)를 받을 순 있지만 전문성이 받쳐주지 못하면 그 오더가 마지막 오더가 될 수 있다. 이는 비단 헤드헌팅 업계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면 전문성만 있다면 모든 거래가 가능할까?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J 대리는 헤드헌터를 평가하여 상사에게 보고하는 역할만 했고 정착 오더를 줄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고 자책을 하며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채용 총괄이 새로 부임하면서 J 대리와의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다. 오랜 기다림 끝에 성사된 거래여서 성심을 다해 인재를 추천했고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만남에는 헤어짐이 있듯이 J 대리는 순환보직에 따라서 다른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다. 부서 이동 이후에도 서로 가끔씩 안부 전화를 주고받던 중 J 대리가 이직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는 거꾸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온 것이다. 헤드헌터의 위치를 간혹 농담 삼아 '갑'도 아니고 '을'도 아닌 '병'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인 오더를 주는 입장인 채용담당자를 소위 '갑'이라고 하면 받는 입장인 헤드헌터는 '을'이 된다. 그런데 채용담당자가 구직자가 되는 경우에는 갑을이 바뀐다. 구직자가 '을'이라는 부분에 다분히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갑과 을'의 관계를 '부탁하는 혹은 부탁받는 관계'라고 단순히 이해했으면 한다. 결국 헤드헌터는 갑도 을도 아닌 '병'이 된다.


J 대리의 고민은 순환보직에 있었다. 순환보직은 기업 측면이건 개인적 측면이건 동전의 양면과 같다. 기업에서는 순환보직을 통해서 직원들의 업무역량의 폭을 넓혀주고 부서 간의 윤활유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전문가 육성이라는 측면에서 단기성과에 차질을 빚고 원치 않는 인사일 경우 조직 이탈을 초래한다. 개인에게는 승진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도 하지만,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곳에 가면 좌천이 된다.


조직 내의 보직변경은 수많은 이직 사유 중에 점차 중요한 요소가 되어가고 있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점차 사라지고 '직업'이라는 개인역량이 보다 중시되면서 특히 사회초년생인 경우 잦은 보직변경은 어떤 일을 맡겨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 아무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비전문가로 평가받기 쉽다. 요즘 세상에 일반적인 '회사원'은 직업이 아니다고 평가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J 대리의 또 다른 고민은 해당 이직사유를 이력서에 기재할 것인가 이다. 어느 기업이든 경력자의 경우 이직사유를 기재하게 되어 있고 사유가 불명확하면 서류에서 탈락시킨다. 그래서 이력서에 실재 사유를 적지 않고, 납득하기 쉬운 표면적인 사유를 기재하는 지원자들도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육아문제로 집에서 좀 더 가깝고 업무강도가 낮은 직장으로의 이직을 희망하지만 표면적인 사유는 경력개발 차원이라고 쓰는 경우이다. 이렇듯 기업은 이력서만 보고는 지원자의 속 마음을 알 수 없다.


J 대리와의 상담은 과거 고객사 담당자가 아닌 한 가정의 가장이자 인생의 후배로서 서로의 삶에 대한 진솔한 대화로 이어졌고 친구가 될 수 있는 시발점이 되었다. J 대리가 이직한 후에도 비즈니스 관계라는 초기 인맥의 얇고 연약한 '고리'는 서로에게 잊혀진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필자의 주변에 이런 만남은 정말 흔치 않지만 친구를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일까 따져보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진솔함'이라고 정의 내리고 싶다.


어떤 지위나 권한 등 영속적이지 않은 껍데기와의 관계맺음보다 그 사람 자체를 바라보는 진솔한 관계가 때로는 좋은 인연을 만들기도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임원을 채용하는 방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