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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살 Mar 24. 2021

잃어버린 후에 잊어버린 것들

업데이트 그리고 초기화, 24시간의 기록

그때의 느낌을 글로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아직은 아프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시작을 돌이키려는 이유는 또다시 잊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 때문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바깥과의 온도차 때문에 버스 안 차창은 뿌옇게 암막이 쳐 있었다. 핸드폰 설정창에 업데이트를 기다리는 빨간색 1 표시가 생겨났다. 테마, 폰트에 환장하는 나로선 스마트폰의 UI가 바뀌는 건 언제나 환영이었다. "회사에 가서 하자" 맘 편히 새벽잠을 보충했다.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을 충전기에 연결하고 업데이트를 시작했다. 여유롭게 책도 읽었다. 두세 번 켜졌다 꺼지면 배경화면을 보여주던 안드로이드가 그날따라 사라질 생각을 안 했다. 책을 덮고, 일을 시작하고,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깨어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지만 아직까진 심각하지 않았다. 급한 대로 네이버에 검색해서 (여러 의견 중) 강제 종료 버튼으로 재부팅을 시도했다.


반응은 똑같았다. 심지어 해커들이 건들 법한 무시무시한 화면이 떴다.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멍청한 눈빛이 검은 스크린에 비쳤다. 핸드폰에 있는 모든 걸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하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건 사진과 메모, 단 두 개뿐이었다. 일생일대의 대만, 베트남 여행, 엄마와의 제주 한 달 살이, 무수히 많은 캠핑의 흔적들... 몇 장이었는지 기억조차 못할 만큼의 사진이, 아니 추억이 이 안에 들어있었다. 메모는 어떠한가. 아르바이트 시절, 간밤에 꾼 꿈, 앞으로의 꿈, 일기, 주정... 문득문득 내 순간을 지배하던 단상이 그 안에 있었다. 2015년부터, 약 6년 간의 기록이었다. 사람이 참 웃긴 게 A와 B를 잃을 처지에 놓이니 그 와중에도 우선순위를 가리게 되더라. 먼저 살리고 싶고, 살려야 할 건 당연히 사진었다. 문득 거의 모든 사진이 SD카드에 담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늘이라도 있으면 얼른 쿡 찔러 SD카드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퇴근해서 집에 도착하는 그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직 맞닥뜨리지 못한 악몽을 끊임없이 상상하는 일이었다.


회사에선 일도 해야 했고 PC 카카오톡도 있었다. 퇴근하는 순간 현실이 시작됐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류장까지 걸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20여 분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때, 나 혼자만 소음의 적막 속에 놓여 있었다. 버스에 오르고 나서도 어색함은 계속됐다. 이 핸드폰이 나를 얼마만큼 용서해줄까, 그 생각뿐이었다. 저마다의 보물을 잡고 있는 사람들의 손을 보았다. 편치 않은 맘으로 억지로 잠을 청했다. 빨리 집으로 가기만을 바랐다.


마스크도 벗지 않고 SD카드를 확인했다. 내가 늘 보던 폴더들이 촤라락 펼쳐졌다. 사진은 총 1만 6천 장 정도였다. 베트남의 소음이, 제주의 바닷바람이, 즐거웠던 순간 모두 그대로였다. 다음 날 바로 서비스센터에 들를 것이다. 이제 메모의 생사만 확인하면 된다. 그러자 중요한 메모들의 존재가 떠올랐다. 그때가 아니면 다신 기억할 수 없을 기록이었다. 메모를 걱정해야 할 지경에 이르자 살아온, 써온 인생을 돌이켰다. 적자생존(적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을 외쳤는데 그마저도 기계가 생존해야 적은 글자가 남는 거였다. 왜 연필과 펜을 들지 않았는지 자책했다. 실연해도 배는 고픈 스타일이어서 그날 저녁 아주 매운 불짬뽕을 먹었다.


충격에 빠져 주변인의 부축을 거절하는 드라마 속 사모님처럼 엄마의 동행을 도리질하고 홀로 차에 올랐다. 익숙한 길을 흘러가는 동안에도 마음은 저 아스팔트 밑에 침전했다. 번호표를 뽑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엔지니어 앞에 앉았다. 핸드폰을 건네받은 엔지니어의 표정에서 안타까움이 단번에 묻어났다. 인사 말곤 아직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상태였다.


"업데이트를 하다가 '뻑'이 난 경우네요. 이건 살릴 수가 없습니다."


만화 속 뽀빠이는 없었다. 방법은 초기화뿐이라고 했다. 뭐라도 선고받은 사람처럼 얼어붙었다. 안에 있는 자료가 모두 소실될 수 있음을 동의하는, 동의 말곤 다른 선택지가 없는 문서에 사인을 했다. 대기석에 앉아 멍하니 정면만 바라보다 눈동자를 굴린 건 그로부터 수분이 지나서였다. 학창 시절 변기에 빠뜨린 핸드폰을 고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 때가 떠올랐다. 스무 살 1월 멋모르고 따라갔던 신장개업 나이트 화장실에 아이패드를 두고 나와 식겁했던 밤이 떠올랐다. 이 밖에도 정말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고, 동시에 머릿속은 하얬다.


푸르게 푸르게 시치미를 떼는 새 폰을 돌려받았다. 구글 로그인부터 와이파이 등등, 기본 설정을 하는 데 이렇게 침울하기는 난생처음이었다. 삼성 계정에 로그인해 (백업한 기억도 없는데) 무작정 동기화를 눌렀다. 화살표가 굴러가고 있으니 뭔가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서비스센터 주차장에서 한참을 액정만 응시했다. 마지막 날짜 2019년, 800여 개의 메모가 살아났다. 이전에 약 2천 개가 있었으니 천 개 이상의 글줄이 증발한 거였다. 모든 걸 잃지도, 지키지도 않은 상태 몇 주가 지났다. 핸드폰 안은 이제 막 공사를 시작한 현장처럼 여전히 부산하다.


문득문득 과거의 썼던 글 조각이 떠오른다. 그러나 무언의 형상처럼, 그림자처럼 흐릿한 뭉텅이만 남아있을 뿐 생생함이라곤 다. 이곳에도, 내 머리에도 남아있지 않으니 분명 보내줘야 하는 길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것들이 떠오르고 잊은 것들의 원망이 들린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외치는 메아리 같은 것으로 이 작은 한낱 기계를 과신한 자기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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