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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살 Dec 16. 2021

여행에도 첫사랑이 있다면,

‘서툴렀던 처음’과 ‘마음의 깊이’, 첫사랑의 정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나의 첫사랑은 두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한다. 한여름 밤 꿈처럼 짧았으나 잊을 수 없이 따뜻했던 낭만. 첫사랑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단 하나의 특별함이 있다면, 1년 뒤 재회했다는 것이다. 같은 계절, 같은 곳에서.


첫 해외여행을 계획하던 2017년 봄, 사드 사태에 물 건너간 상하이 대신 차선으로 택한 곳이 대만이었다. 상하이의 옛 거리와 디즈니랜드를 한껏 상상해둔 탓인지 대만을 향한 기대보단 먼 나라 이웃나라에 가게 됐다는 설렘이 더 컸다. 항공편마저 김포공항이었다. 첫 해외여행에 인천공항 한 번 가보지 못하고 이륙한 엄마와 나는 대만에서조차 타오위안 국제공항이 아닌 쑹산공항에 착륙해야 했다.

말 그대로 온난 습윤한 기운이 가장 먼저 대만임을 알려왔다. 공항철도에서 바로 연결되는 MRT를 따라 중산역으로 향했다. 아담하고 쾌적한 전철 창밖으로 반대편의 전동차와 서울만큼 잿빛인 건물들, 무성한 한자가 보였다. 대로와 골목을 흘러가는 노란 택시와 오토바이 행렬도 내가 사는 곳과는 새삼 다른 풍경이었다. 하루는 예류 지질공원과 진과스, 지우펀을 돌아보는 버스 투어에 맡기고, 3일간 필수 여행지 몇 곳과 일상의 골목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어릴 적 은행 놀이하듯 지폐와 동전을 부산스럽게 뒤적이며 소비의 순간을 만끽했다. 365일 중 200일 이상 비가 내린다는 대만에서 우산 펼 일은 없었다. 숙소가 있던 중산 구석 골목에 자리한 로컬 이자카야에서 보낸 마지막 밤은 가히 하이라이트라 할 만했다. 초심자의 행운에 빠져든 걸까. 대만에서 돌아온 나는 처음으로 여독을 앓았다. 한창 흥이 오르던 꿈속에서 홀로 튕겨져 나온 기분이었다. 돌아오는 날 처음 먹어 본 버블티 한 잔과 어느 이름 모를 골목의 풍경, 읽어줄 수 없던 한자 간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올랐다. 상실감, 그리움, 애정, 내게 밀려온 것은 그 전부였다.

딱 1년 뒤 봄, 눈과 손에 익었던 일을 놓아주고 나서야 다시 대만을 잡아볼 수 있었다. 이번엔 동생을 더해 세 모녀가 함께였다. 애초에 새것은 없던 것처럼 시간의 자국이 깊이 밴 회색 건물, 칙칙한 골목의 생기를 불어넣는 화초 무리와 고양이의 순찰이 눈에 익었다. 편의점을 지날 때마다 진동하는 차예단의 고약한 냄새, 빈티지한 카페와 상점, 수줍지만 친절한 사람들, 나란히 정렬된 자전거와 오토바이, 그리고 기-승-전 화초까지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이름 대신 길을 외운 중산 골목 이자카야의 문지방을 넘고 나서야 둘에서 셋으로, 같고 또 달랐던 두 번째 대만 여행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역시 좋은 음악의 후렴구는 한 번으론 부족하다니까! 한 칸 두 칸 점등되는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퇴근 후 피로한 걸음으로 가방을 내려놓을 이들의 일상을 상상했다. 여전히 가방을 짊어진 나는 시한부 여행자의 유유한 처지가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또 바랐다. 다카포! 처음부터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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