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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살 Aug 03. 2019

[한편보고서 3] 대학로 연극, 뷰티풀 라이프

사랑과 젊음, 시간 속에 물든 낭만

등이 조금 굽고 키가 큰 노인(할아버지 김춘식)이 휴대용 라디오를 목에 건 채 등장한다. 소파에 앉아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듣는다. 잠시 후, 눈이 거의 감겨있고 등이 굽은, 키가 작은 노인(할머니 박순옥)이 등장한다. 그리고 연극은 시작되었다.  

그날은 박순옥 할머니의 생일이었다. 아들 내외와 손자들과 시끌벅적한 하루를 보내고 싶건만..다 키워놓은 아들 새끼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며느리만 훅 왔다 훅 가버린다. 부스락거리며 들고 있는 과자봉지는 제 자식 맥일 거란다. 마음에도 없는 "저희 집에도 오고 그러세요"란 말만 내뱉고 도망치듯 후딱 가버린다.


지내온 세월만큼 야윈 박순옥 할머니와 예나 지금이나 투덜거리지만 늘 곁을 지키는 김춘식 할아버지. 두 사람은 모처럼 공원으로 나가 담소를 나눈다. '별을 따다주겠다'던, 무려 50년 전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는다. "오다 주웠다"며 시크하게 갈색 귀마개를 선물하는 김춘식 할아버지. 할머니는 자기가 좋아하는 색은 빨간색이라고 투박한 반응을 보이지만 곧바로 귀에 건 귀마개처럼 입가에 미소도 걸려있다.  

김춘식 할아버지의 등에 업힌 채 두런두런 시간을 보내던 박순옥 할머니. 마침 불이 꺼지고 다시 켜졌을 땐 할머니가 라디오를 목에 건 채 홀로 소파에 앉아있다, 빨간 귀마개를 하고.  달라진 게 더 있다. 노인정의 김 선생과 그가 준 꽃다발을 견제하며 꽃은 꺾고 줄기만 넣어놓았던 화병엔 풍성한 꽃이 담겨있고, 늘 걸려있던 외투도 없다. 그리고, 김춘식 할아버지도 없었다.

담담하게 앉아있던 박순옥 할머니는 라디오를 켜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듣는다. 할머니가 떠올린 첫 번째 회상은 약 30년 전쯤이었을 거다. 아내 박순옥이 시력을 잃는 동안 집안 남자들은 제 할 말만 하느라 바빴다. 김춘식은 낚시를 못 가게 한다며, 당신 때문에 형 내외 보기가 민망하다며 불만하고, 무섭기로 소문난 중2병에 걸린 아들은 빨래를 잘못 빨아놨다는 이유로 투덜거린다. 노인이 된 김춘식과는 달리, 가장 노릇을 하고 있는 40대의 김춘식은 아내를 위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군다. 아내와의 약속보단 친구와의 낚시 약속이 더 중요하고, 시댁은 당연해도 처가는 불편하다. 아내 박순옥에게 진정 어둠이 찾아왔을 때, 비로소 김춘식은 그녀를 감싸 안았다.  

분명 불꽃같던 시작이 있었다. 이들의 시작은 인심 좋은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부산의 어느 대폿집에서였다. 아주머니를 대신해 일일 알바를 왔던 박순옥과 자리에 앉아 홀로 술을 마시던 김춘식. 첫눈에 반한 김춘식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에 박순옥은 수줍게 응답했다. 서울에서 직장을 잡은 김춘식이 부산역에서 주소를 잘못 받아 적은 탓에 두 사람은 3년 간 만날 수 없었다. 요즘이라면 전화, 문자, 카톡, SNS까지 서로의 안부를 모르기가 어려운 세상이지만 그땐 그랬다. 3년 만에 같은 대폿집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그간의 오해를 풀고 두 번째 사랑을 시작했다.  

그렇게 50년을 함께 늙어온 거였다. 풋풋한 청춘의 사랑을 지나 지긋지긋하고 권태로운 결혼생활 끝에 의지할 것은 서로뿐. 여자와 남자, 아내와 남편, 어머니와 아버지. 누구도 다르지 않게 같은 노선 위에 있었다.  
  
시작부터 눈시울이 아팠다. 그리고 보는 내내 울다 웃다를 반복했다. 그 안에 진심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연기, 연출, 무대 모두 최고였고, 사투리 연기를 비롯해 극의 흐름을 끌어가는 몰입도 또한 최상이었다. 90분이라는 시간 동안 지루할 틈 없이 남녀의 서사 속에 함께였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객석은 생각보다 비어있었다. 김춘식 역을 맡았던 배우 김태향 역시 그 점을 짚고 넘어갔다. 그래, 관객들의 살아있는 반응으로 연기할 힘을 얻어가는 연극배우들에게 비어있는 객석만큼 아쉬운 게 있을까. 그래서 얘기해주고 싶었다.


'뷰티풀 라이프'를 먼저 본 엄마와 동생의 강력 추천으로 내가 오게 된 거라고. 함께 온 엄마는 두 번째 관람이었음에도 여전히 애틋하고 감동적으로 보았다고. 엄마, 아빠, 할머니, 돌아가신 할아버지, 그리고 먼 훗날 내 젊은 날의 초상을 떠올릴 때 언제든 이 연극이 반투명한 상태로 재생될 거라고.


CASTING
김춘식 : 김태향

박순옥 : 김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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