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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살 Jul 28. 2019

[한편보고서 2] 8월의 크리스마스

이별로써 영원히 남은 사랑

엄마와 군산 여행을 계획했다. 군산의 주요 명소하면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배경이 된 '초원 사진관'이 단박에 뜬다. 숙소와도 가깝고 워낙 유명하니 필수 코스로 넣었지만, 영화를 보지 않고 그곳에 간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운을 잊지 않기 위해 여행 전날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기로 했다.  

1998년 작품인 <8월의 크리스마스>는 지금의 또렷한 화질에 비하면 어슴푸레한 화면이 이어진다. 장면의 전환에서 상황의 급격한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호흡할 수 있는 영화여서 참 좋았다. 머리를 굴려 전개를 이해할 필요도 없고 한국 영화의 단골 소재인 욕설도 나오지 않는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일상에, 죽음을 앞둔 정원(한석규 분)의 남아있는 나날들이다.  

정원 앞에 다림(심은하 분)이 나타난 건 정원이 다른 사람의 장례식장에 다녀온 후 씁쓸한 마음을 감출 길 없던 그 순간이었다. 단정하고 맑은 모습으로 나타나 조금은 무례하게 보이기도 할 만큼 자신의 사진을 빨리 인화해줄 것을 요청하던 다림. 한 여름날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났고 정답게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 후로 '초원 사진관'의 단골이 된 다림은 정원에게 늘 속을 알 수 없는 물음과 이야깃거리를 던진다. 정원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너그럽고 친절한 선인(善人) 그 자체다.  

초원 사진관에는 학창시절 첫사랑이었던 지원(전미선 분)이 사진이 늘 걸려있었다. 지나간 세월만큼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과 혼인했다. 남편의 도박빚과 폭력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동생 정숙(오지혜 분)에게 전해 들었지만 정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결혼 후 군산을 떠났던 지원이 정원에게 찾아와 그의 건강을 걱정했다. 이미 지나간 사랑에 '나 이제 곧 죽어'라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었던 그는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다. 지원이 떠난 후 정원은 이렇게 말했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 서먹하게 몇 마디를 나누고 헤어지면서 지원이는 내게 자신의 사진을 지워달라고 부탁했다.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  

한 번 마음에 들어오고 나니 좁은 동네에서 마주치는 건 다반사였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이따 일 끝나고 술 한잔하자'던 다림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밤 정원은 영화 속에서 가장 약하고 슬픈 모습을 보였다. 정원은 폭우에다 천둥번개까지 치자 으슬으슬한 마음이 드는지 계속 뒤척였다. 그는 참다못해 노쇠한 아버지(신구 분) 옆으로 가 누워 잠을 청했다. 천둥번개에도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가 죽음이 두렵지 않을리는 없었다.  

사람들은 사진관을 추억이 간직된, 행복한 기억을 남기고자 하는 낭만적인 장소로 기억하지만 그 안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아픈 영상들이 꽤나 많다. 휴지통에 휴지만 들어가 있는 게 아니듯 간직할 것이 즐겁고 행복한 순간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림이 정원을 찾아오지 않던 날, 한 할머니가 거센 비를 뚫고 사진관에 찾아왔다. 단정히 빗은 머리에 곱게 한복까지 차려입으시곤 당신의 영정사진을 다시 찍고 싶다던 할머니. 카메라 안 거꾸로 비친 할머니의 모습과 최대한 정성껏 찍어드리려는 또 다른 시한부 정원. 그 두 사람이 존재하던 사진관의 모습이 가장 먹먹한 시간이었다.  

정원과 다림. 두 사람은 놀이공원에서의 추억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 정원의 상태가 악화됐고, 투병 사실조차 몰랐던 다림은 이유 없이 차인 꼴이 돼버린 것이다. 처음엔 의아함에서 궁금함으로, 걱정에서 미움으로. 깜깜한 초원 사진관을 바라보며 다림은 기다림에 대한 많은 감정의 변화를 느꼈다. 솔직한 마음을 적어내렸던 그 편지를 마지막으로 다림은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았다. 한겨울이 돼서야 돌아온 정원은 쌓인 우편물 속 다림의 편지를 보게 됐다. 다림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던 정원은 정성스레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정원이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은 꽤 담담하고 일상적인 순간들로 채워졌다. 친구들과 마지막 사진을 찍는 것, 아버지에게 비디오 작동법을 알려드리고 사진관 운영 안내서를 작성하는 것, 다림의 마지막 모습을 눈 안에 담아두는 것, 끝으로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는 것. 


잠시나마 좋았던 기억으로 남을 즈음, 다림이 오랜만에 초원 사진관을 찾았다. -출장 중-이라는 메시지보다 눈에 띈 건 사진관 앞에 걸려있는 자신의 사진이었다. 비록 만날 순 없었지만 그가 자신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마지막 만남 이후 숱한 날 동안 감정의 끈이 끊겨버린 것은 아니었다는 반증이었다. 그 자체만으로 다림은 웃으며 돌아설 수 있었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났다. 정원의 답장이 전해지지 않음으로써 다림이 그의 죽음을 끝까지 몰랐다는 사실은 괜스레 안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과거 지원과의 사랑이 지나간 것으로만 그쳤던 것이 못내 아쉬웠던 정원이 다림만큼은 끝까지 잃고 싶지 않기에 했던 선택이 아니었을까. 두 번 다시 보지 않음으로써 서로가 아름답게 남았으니까.  


여행 중 초원 사진관 앞에 섰을 때 왠지 모를 벅참이 느껴졌다. 실존 인물도, 실화도 아니지만 그 공간 안에 있던 정원과 다림의 영상이 초원 사진관 창문에 어릿하게 비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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