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우리는 소비로 태어나 소비하며 죽는다. 현대 사회에서 비밀적 잉태 후 몰래 낳는 아이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아기는 산부인과에서 태어난다. 존재 자체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나 어쩌면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께 삶의 첫 빚을 지는 걸지도 모른다. 또한 죽음 후에도 장례라는 의식을 치름으로써 '잘 보낸다'는 의미의 소비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생활의 3요소는 의식주, 즉 옷과 음식과 집을 이른다. 이 또한 소비가 아닌 것이 없다. 소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새로운, 더 자극적인, 더 화려한 소비를 부른다는 점에서 굴레나 쳇바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얼마 후엔 그 느낌조차 잊은 채 또다시 소비하겠지만).
쇼핑몰의 기원과 구조를 보면서 이케아와 이마트 트레이더스, 그리고 스타필드가 생각났다. 이케아에서는 곧장 물건을 사러 갈 수 없고 언제나 쇼룸을 통해 가야 한다. 내가 살 것이 20 섹션에 있더라도 1-19까지의 섹션들을 다 지나쳐 가야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론 고양점보다 광명점이 더 심한 편이었다. 그렇게 이케아의 모든 쇼룸을 둘러보고 나면 다리는 아프고 사야 할 목록은 줄을 선다. 지금 나의 집, 내 방 또한 '꽤' 괜찮음에도 소비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황홀경에 빠지는 것이다. 이케아는 심약한 소비자들로 하여금 무엇이라도 사지 않을 수 없게 만든 후, 심지어 '알아서' 가져가게끔 하는 무지막지한 공간이다.
이마트 트레이더스는 기존의 이마트보다 훨씬 발전된, 복합 쇼핑몰이다. 처음 트레이더스를 방문했을 때 이토록 이국적일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놀라웠다. 돈을 쓰고도 아깝지 않을 만큼의 복지(?)가 주어진 듯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마트의 대부분은 가볍고 신선한 물건들이 입구 앞에 놓여있고 점차 무거운, 그러나 꼭 사고 말 듯한 물건들이 가장 뒤편에 있다. 예를 들자면 술이 그렇다. 술은 언제나 맨 뒤편에 있다. 과도한 음주를 줄이기 위한 방침일 수도 있지만 최종 목적지인 술을 향해 가는 동안 안줏거리가 될만한 수십 가지가 늘어서 있는 걸 보자면 구석구석 카트 없인 절대 안 된다.
스타필드는 주차장에서 실내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왠지 롯데월드가 떠오른다. 투명한 수정관에 혹하는 상점들이 즐비해있고, 볼거리 먹거리가 한데 어우러져 장관이 된다. 너무나 여유로워서 이곳에서 소비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감이 든다. 개장 후 처음 갔을 때부터 완성도 높은 쇼핑몰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촌의 국립중앙박물관처럼 하루 안에 다 둘러보기엔 무리가 있다. 수많은 상점 중 내가 소비할 수 있는 공간은 손에 꼽을 정도지만 과거 건축가 빅터 그루엔이 얘기했듯 -예쁘고 개성 있는 상점들과 그 사이사이의 노천카페, 그 앞을 천천히 걷는 사람들의 여유로움으로 인해- 막연히 '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의복, 도자기, 비누, 약에 이어 화장품, 수집, 성형, 쇼핑몰 등 사람의 손이 닿는 곳이라면 정말 소비가 아닌 것이 없었다. 인간의 소비 역사에서 흑인과 노예 계급에 대한 부분 역시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었고, 우리는 그들이 맞서 온 시간들의 혜택을 지극히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경험의 획일화'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자유의지로 소비의 주체가 되어 선택을 하는 듯 하지만 결국 철저한 계획으로 짜여진 한정된 공간 속에서 획일화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p52. 근대 여성에게는 '소비하는 일'이 허락되었지만, 그 소비는 언제나 '대리적'일뿐 여성의 본질이 될 수는 없었다.
p112. 정식 의사가 환자와 대화를 통해 병을 진단하는 쌍방향 소통을 한다면, 돌팔이 의사의 화법은 일방적인 연설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그 연설에 빨려 들어 홀린 듯이 약을 샀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자면 환자 개개인의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런 화법이 먹혔다는 게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화법은 매우 효과적인 설득 방식이었다. 모든 말이 '무조건 낫는다'로 귀결되는, 오직 치료라는 사실에만 집중된 강력한 선전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ㄴ과정 없이 결론만 도출된 문구는 너무나 단순해서 속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의외로 효과적이다. 오히려 자세한 설명은 끊임없는 질문만 낳다가 간만 보고 식을 때가 많다. 사람들은 자극적이고 명쾌한 것들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무조건 합격' '절대 보장' '100% ㅁㅁ'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앞뒤는 다 잘라먹고 논리에 어긋나도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돈을 지불할 용의가 생긴다. 아직까지도 "뭔가 속는 것 같지만 그 화술이 너무나 매력적이고 번지르르한" 사람들에게 '약장수'같다고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은 아닐까.
p118. 특허약 광고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질병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없던 병도 갑자기 생겨나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ㄴ요 몇 년 사이 급부상한 '공황장애'가 떠오른다. 몇몇 연예인들이 공황장애를 앓았다고 털어놓은 그 순간부터 마치 공황장애가 완장인 듯 손을 드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이전의 사회가 그만큼 폐쇄적이고 정신질환을 금기시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새로운 질병에 대한 정보가 등장하면서 조그만 우울감에도 버티지 못한다는 절망감과 함께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고 털어놓는 사람들이 분명 많을 것이다.
p121. 아파서 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약이 '공급'되기 때문에 그것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난 것이다.
p210. 책은 독자가 소비하는 순간에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저자의 손을 떠난 원고의 의미와 가치는 결국 소비자의 손에서 결정된다. 독자는 본질적으로 텍스트의 세계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여행객이며, 저항성을 내포한 존재다.
p235. 스스로가 충동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힘에 의해 노예가 되는 상태는 근대적 모순이 낳은 사생아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런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운 '건강한' 사람이란 근대사회의 모순적 관계 속에서 절묘하게 줄타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일컫게 된다. 즉, 적절한 소비로 스스로의 삶을 풍요롭게 하면서 절대로 과도한 충동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 말이다. 그런데 광적 도벽 같은 '질병'은 궁극적으로는 개인이 해결해야 할 몫으로 남겨지게 된다. 질병의 원인을 비록 사회가 만들어냈다 할지라도, 질병의 고통은 개인이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사치금지법 같은 법 규정만 지키면 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넘쳐나는 소비의 세계에서 정신병자라는 낙인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끊임없이 중용과 자기 절제를 고민해야만 한다. 그야말로 '정상적인 현대인'으로 살아가는 게 결코 녹록지 않은 과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p340. 카탈로그는 이 세상에 어떤 물건들이 팔리고 있는지를 소비자에게 알리는 동시에 상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카탈로그를 보는 사람들에게 그 안에 담긴 상품은 무엇이든 원한다면 가질 수 있다는 환상을 불어넣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상품들 하나하나를 '공부'하는 동안 사람들은 스스로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성장사회'의 특성이 소비의 영역에 투영된 결과물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성장사회를 재화를 생산하는 사회이기 이전에 특권을 생산하는 사회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런데 빈곤을 수반하지 않는 특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의 진보가 성장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권 계급, 즉 불평등한 사회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필요성이 곧 성장을 생산해낸다는 통찰이다. 결국 성장사회의 지속은 지배질서가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 끊임없이 불평등 구조가 재생산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이 소비라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학습되며 실행되는 것이다.
p341. 누가 보더라도 너무 예쁜 물건을 보고 구매 버튼을 누르는 일이 욕망의 평등화 순간이라면, 가격을 보고 너무 비싸서 황급히 취소하는 일이 소비의 계급화를 절감하는 순간이라고 할까.
ㄴ결국 우리의 소비는 우리가 위치한 소비의 계급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보다 더한 것에 욕심을 부리게 되는 것이 빚이다.
p353. 존 고스(John Goss) 같은 학자는 과거로 돌아가는 착각을 주는 몰의 장치들은 "옛날의 진짜 공동체를 그리워하는 현대의 향수"를 자극하여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p409. 근대 소비사회에서는 인간의 행위나 존립이 물질처럼 취급되는 '물화(物化)'를 겪게 되며, 인간은 '구매력을 지닌 소비자'로 전화(轉化)하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소비가 곧 '삶의 질'과 동일시되면서 계급모순이나 계급불평등이 은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