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보고서] 러브 팩추얼리

사랑에 대한 사실

by 곰살

학창 시절 풋풋했지만 어리석었던 첫사랑 앓이를 끝낸 후, 어른이 되면 보다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서로에게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있고 연락 한 번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정숙한 모습으로. 그러나 나이가 들어도 사랑의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똑같이 유치하고 똑같이 질투하며 똑같이 권태롭다. 주는 것보다 더 많이 받고 싶고 이해하기보단 이해받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의 사랑은 초월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며 수많은 콘텐츠를 양산한다.

이 책은 대부분 사랑의 종착역에 다다라 본 사람들, 즉 기혼자 경험을 위주로 서술하고 있다. 결혼이 사랑의 종착역인 이유는 그것이 마지막 과정이어서가 아니라 열차에서 내려 스스로 돌바닥을 걸어야 하는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열차 안에선 흘러가는 풍경의 낭만과 더 나아가고 싶지 않을 때 내릴 수 있는 선택권이 남아 있다. 그러나 종착역에 다다라 열차가 떠나면 그때부터 끈 없는 2인 3각이 시작된다. 하나이지만 철저히 분리되어 있고, 다른 존재이지만 결국 내 삶의 거울과도 같은 그 사람과. 서로를 만나 평생을 약속했던 순간부터 감정이 어그러지는 순간,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깨닫게 되는 경험, 자식이라는 새로운 책임감의 무게까지. 기혼자들의 삶은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마저도 사랑의 또 다른 양상이며 어떠한 것도 쉽게 판단하거나 결론 내릴 수 없다.

p203.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흔한 실수입니다. -파시데
p205.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일도 당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바꾸진 못하며, 또 삶의 어느 시점에선가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게 되고 궁극적으로 당신 자신도 죽게 된다는 사실 또한 바꾸지 못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당신이 고립돼 있다는 걸 인정하고 직시하는 것이며, 그런 다음 그 고립감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 고통을 사랑으로 상쇄하는 것이다(사람들을 도구처럼 이용하지 말고).

인간은 늘 외롭다. 듬직한 사랑이, 따뜻한 가족이 나를 에워싸고 있더라도 외로움은 늘 있다. 음식을 먹어 허기를 채워도 또다시 배고픔을 느끼는 것처럼 안정된 관계 속에서도 새로운 외로움이 파생된다. 내 외로움에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이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외로움을 탈피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떠나갈지 모르는 어떤 타인에게 나 모두를 내맡기겠다는 것과 같다.

p238. 비현실적인 기대들은 관계를 너무 단순화시키며 또 인간을 비교하게 만든다. 인간은 원래 불완전하고 결함이 많은데, 비현실적인 기대를 통해 상상 가능한 가장 완벽하고 결함 없는 인간이 탄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 둘을 비교하면서 실망하게 되고, 당신의 파트너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로맨틱한 사랑에 대한 욕심이 드라마나 영화, 심지어 애니메이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은 말 그대로 사실이며 꽤나 흥미롭다. 작품 안에선 요괴나 악당들, 악한 캐릭터들이 들끓는 위기와 고통 속에서 가뭄의 단비 같은 하나의 사랑을 만난다. 억겁의 시간, 기억상실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요즘은 현실적인 연애 관계를 다루는 작품들도 꽤 많지만 그마저도 대사가 하나같이 낭만적이다. 언제나 깨어있는 존재이고, 바보 같던 여주인공도 필요에 의해 똑 부러진 인물로 변모한다. 어떤 상황에서건 맹목적으로 지켜봐 주고 옳은 길로 이끌어주는 친구나 서브 남주도 빠질 수 없다. 가상의 작품이 만들어 낸 로맨스는 우리를 닿을 수 없는 신기루 안에 매몰시키는 작업을 가속화한다.

사랑 후에 남는 아쉬움과 반성의 의미를 담아 '다음 사람에게는 어떻게 행동하겠다'는 다짐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사랑을 일종의 실험으로 보는 것과 같다. 이번 중간고사의 답으로 다음 기말고사 OMR을 작성하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내 행동의 변화가 다음 사랑을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거란 판단은 다음 사람이 결국 이전의 인연과 같은 성질을 지녀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달아둔 실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실험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언뜻 성공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머지않아 새로운 변이 현상에 부딪혀 또다시 아파할 것이다.

남의 경험은 내 경험이 될 수 없음에도 '이미 경험한' 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러브 팩추얼리'는 답이 정해지지 않은 갖가지 종류의 사랑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결국은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애착 관계가 어떠하든 마음의 틈을 넓혀 숨구멍을 줘야 하는 타이밍임을 알려줬다. 자존감이나 자신감, 이타심이 부족한 사람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형태 안에 나 역시도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당신은 로맨틱한 파트너에서 어떤 걸 찾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졌어야 했던 것이다.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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