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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살 Aug 21. 2019

순간은 바람으로 남았다.

순간은 바람으로 남았다
그때의 공기와 감정은 꾹 눌러 짠 핸드크림처럼 끈적였으나
이내 촉촉한 질감으로 내 안에 스며들었다.
사진 속 실루엣이 내 눈 앞에 실재해도
그 공간 속 그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나고 없었다.
그 시간 속 그들은 땅 위에 멈춰 선 채 날아가버렸다.
그들은 계속 여행 중이다.
-2018년 5월 1일의 기록 중


핸드폰을 바꾸면서 오랜만에 갤러리를 정리했다. 우연히 발견한 사진 한 장 편지 몇 장에 주저앉아 한참을 들여다보며 정작 방청소는 뒷전인 것처럼 추억에 젖었다. 내가 잊고 지냈던 무수히 많은 날들. 많은 음식. 얼마나 숱한 순간들을 사진 몇 장에 남겨두고 오늘내일에 전전긍긍해왔는지 깨달았다.


2016년에 조바심을 내던 나는 2019년에도 여전히 그랬다.
2017년에 안달하던 나는 2019년에도 여전히 그랬다.
2018년에 속을 태우던 나는 2019년에도 여전히 그랬다. 삶이란 것이 지당하게도 뜻대로 되지 않음을, 용기를 내는 일이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님을 여실히 느끼며 소심하게 산다. 그리곤 빵조각을 입에 물기 위해 매일같이 어깨 위로 지워지는 과제에 몰두한다.

그러나 사진 속 모든 순간들은 너무나 행복했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가족과 함께하던 순간, 여행하던 순간, 맛있는 걸 먹던 순간들을 불확실한 고민과 새로운 식도락에 초점을 빼앗겼던 건 아닐까. 왜 매일같이 감사하지 않았는지, 소중한 찰나를 마다하고 이기적인 게으름의 편을 들어줬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장자의 나비처럼 사진 속의 나와 지금의 나를 구분 짓기란 어려운 일이다. 운전실력이 더 늘었고 '아닌 것'에 대해 '아니'라고 하는 법을 좀 더 배웠으며 지금처럼 글을 쓰고 있지만 작심 과거에 머무르고 만 것들도 허다하다. 여전히 나일뿐인 내게 더 나은 날을 줄 수 있는 법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할 것만 같다.

이 메모 또한 저만치 뒤로 밀려 잊혀지고 말걸 안다. 대소사의 성벽에 부딪혀 머리를 못 내밀겠지. 그런 나를 위해 갤러리 정리 도중 발견했던 (제목도 모르고 찍어둔) 책 한 구절을 읊어주기로 했다.

당신이 글을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더 이상 어떤 글도 쓰지 않는다면? 당신의 일상과 꿈을 기록하지 않고 그냥 흘려보낸다면? 이따금씩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를 쓰는 데 만족한다면? 여기엔 답이 없다. 생각해보기 바란다. 아니면 글로 써보거나.

수년이 지나고 나자 글을 쓰지 않으면 내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지점에 도달했다. 예전엔 오락거리였던 것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과 단 둘이 남았고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해야 했다. 글을 쓰는 게 아주 어렵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쨌든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프레더릭 시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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