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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살 Sep 10. 2019

피아노를 그만둔 이유

나는 피아노를 칠 줄 모른다. 아니, 칠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7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던 나는 왜 피아노를 익히지 못했던 걸까? 그 이유를 찾기 전에 나의 피아노 선생님들을 떠올려봐야겠다.


7살의 어느 날,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했다. 작은 엘리베이터에 올라 3층(기억은 잘 안 나지만)에 도착하니 도복을 입은 태권도장 아이들이 들어있는 공간과 관장실 말곤 다른 곳이 없었다. 엄마는 내게 태권도를 가르치려 그리로 데려갔던 거였다. 엄마에게 밝힌 적은 없었으나 발레복 같은 걸 입고 싶던 나로선 하얗고 펑퍼짐한 도복에 남자애들이 우글거리는 태권도가 싫었다. 마르고 단단해 보이는 관장님이 무섭기도 했다. 어른들 앞이라 내색은 못했지만 집에 가는 내내 하기 싫다고 투덜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얼마 후, 나는 도복을 입고 흰 띠를 맨 채 그 도장 안에 정좌를 하고 앉아있게 되었다. 과거 동네 12살 오빠에게 주차장으로 끌려갈 뻔했던 일, 학교 주변에서 이상한 일이 있었다는 소문, 흉흉해지는 세상 등 태권도를 배울 이유는 많았다. '남자애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그 무리 안에 들어섰다. 결과적으론 정말 잘한 일이었다. 원체 힘이 좋기도 했던 나는 태권도와 아주 잘 맞았다. 품새를 익히는 것도, 발차기를 하는 것도, 정규 수업이 끝나면 불을 꺼두고 사범님들이 무서운 얘기를 해주시던 것도 모두 좋았다.


태권도를 배우던 동시에 시작하게 된 게 피아노였다. 걸어서 15~20분 정도의 거리였던 것 같은데 햇살이 밝게 들어오고 화장실 한 칸 간격으로 하얀 문이 달린 방들이 있었다. 그 앞엔 원형 탁자가 있었다. 서너 명의 선생님들은 모두 젊은 여성이었다. 연습할 때마다 연습 기록장에 갖가지 색연필로 그림 안을 채우는 희열은 피아노를 치는 것보다 엄청났다. 그런데 배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계속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뚱땅뚱땅 기초만 잠시 알려준 뒤 5분도 안돼서 문을 닫고 나갔다. 그리곤 빨갛고 작은 전화기로 남자 친구와 계속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들끼리 다 같이 모여 삼삼오오 수다를 떠는 일도 허다했다. 수업시간에 불필요한 전화를 하면 안 된다는 기본 중에 기본을 지키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려 엄마에게 말했고, 결국 중이었던 나는 절을 떠났다.


다음은 단지 내에 있는 피아노 교습소였다. 내 또래의 여자 아이와 남자아이(오빠)가 있던 가정집이었는데 미닫이 문 안으로 피아노 한 대가 있었다. 정말 열심히 배워보리라 다짐하며 피아노를 쳤는데 이 선생님도 어느 날부터인가 미닫이 문을 닫고 나와 다른 세상에 있었다. 그리곤 자기 아이들에게 짜장면, 탕수육을 시켜주고 과자를 주 여유로운 오후를 보냈다. 수강생인 나는 또다시 섬에 들어앉았다. 가구를 옮기거나 동네 이웃 아주머니들이 찾아와 수다를 떠는 일도 다반사였다. 기껏해야 1시간인 수업에서 한두 번도 아니고 거듭 맛있는 냄새와 수다 소리를 4D로 느끼며 피아노를 치려니 이것 또한 올바르지 않다고 느끼게 되었다.


기본기를 완전히 익히기도 전에 두 번이나 좌초되자, 흥미는 급속도로 떨어지게 되었다. 집에는 피아노가 없어서 연습할 수도 없는데 배우러 간 곳에서는 내리 거슬리는 마음이 드니 재밌어질 리가 없었다. 이후 나는 이사를 했다.


이사를 온 곳 바로 앞 상가에는 피아노 학원이 두 개가 있었다. 그중 한 곳을 등록해 다시 시작해보기로 했다. 새 동네에서 새로운 열의에 찬 나는 피아노를 사달라고 한동안 엄마에게 졸랐고 큰 맘을 먹은 엄마는 일시불로 피아노를 데려오셨다. 선생님은 괴팍하셨지만 그래도 가장 많은 발전을 할 수 있었기에 꽤나 평화로운 날들이 지나갔다. 멀쩡히 납부한 한 달치 수강료를 갑자기 안 냈다며 논란을 야기하기 전까지는. 본인이 영수증을 발급하지 않아 놓고(혹은 어디에 뒀는지도 모르고) 늘 정성스레 봉투에 현금을 담아 손글씨로 감사 문구를 쓰는 엄마를 의심한 것이다. 결국 엄마와 이모까지 와서 갑론을박을 하게 된 후 난 또다시 집에 있는 피아노와 둘이 남게 되었다.


물론 내가 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집에 있는 피아노와 사투를 벌여서라도 독학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정한 연습량을 채우기도 전에 자꾸만 꺾이는 상황을 맞이하자 애꿎은 피아노만 멀리하게 되었다. 피아노는 있고 스스로 연습은 안 하게 되자 엄마는 옆 동의 피아노 교습소에 다시 날 데려가셨다. 풍채가 있는 그 선생님은 내 또래의 딸이 있는 분이었다. 처음엔 친절한 듯 보였으나 언젠가부터 틀릴 때마다 자로 손가락을 때리기 시작했다. 결말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것이다.


나의 마지막 피아노 선생님은 젊은 재즈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이제는 선생님이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안경을 쓰고 조근한 말투에 늘 뚱뚱한 연두색 색연필로 필기를 하시던 그 선생님. 약속시간을 매번 어기셨고 끝나는 시간은 뒤죽박죽이었다.


그리하여 나의 피아노史가 끝이 났다. 피아노가 아닌 선생님의 지도와 사투를 벌이던 나는 젓가락 행진곡(그것도 오른편)만 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다행히 그 시간 동안 태권도는 꾸준히 해서 중학교 2학년 땐 4품을 따놓을 수 있었다.


무엇을 배울 때 배우는 이의 마음가짐도 물론이지만 가르치는 사람의 태도 또한 중요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던 헬렌 켈러에게 모든 걸 가르쳐준 설리번 선생님의 사례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는 스승들이 내겐 많지 않았다. 아쉬움이 남는 건 내 마음뿐만이 아니었다. 피아노 가게에 모두 내어준 엄마의 월급, 매달 들어갔던 수강료, 백 번도 치지 못한 느낌으로 자리만 차지하다 몇 년 전 떠나보낸 피아노까지. 모든 게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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