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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살 Oct 01. 2019

안전 말고 안녕

시월, 책 그리고 여행과의 안녕

보낸 줄 알았던 여름이 갈 생각도 않고 꼭 붙어있다. 머리카락에 덮인 목이 뜨끈하게 젖어있다.

2019년을 보내기까지 단 3개월. 날씨야 어떻든 간에 시월을 맞이하게 됐다. 불규칙한 생활 패턴에 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이 모레 같은 하루의 연속으로 보내버린 아홉 달. 매번 똑같은 일상이 지루하다기보단 너무 안전해서 벌써 결과를 알아버린 성적표 같았다.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나를 흔드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두 가지를 바꿔보기로 했다.

하나는 독서의 변화다.

독서에도 슬럼프가 있다. 탄력을 받을 땐 눈을 쉼 없이 굴리며 책장 넘김에 희열을 느꼈고, 생각의 가지에 의해 통찰력이 솟구치는 기분이 들곤 했다. 도서관에 가서 자전거 바구니 가득 7권의 책을 실어와 하나씩 타파해가는 재미도 있었다. 반면 95%의 자의와 5%의 타의로 인해 게을러져 있을 땐 한 두 글자에서조차 진도가 안 나갔다. 한글을 이제야 뗀 듯 눈 따로 글자 따로 박자가 맞지 않았다. 에스컬레이터가 아닌 러닝머신을 뛰는 느낌,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 하는 무력감으로 더 이상 다른 사람의 글자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래서 브런치를 재개했다. 감사하게도 브런치 작가 첫 도전에 합격증을 받았지만 때마침 찾아온 작심 귀신(?)에 벌여놓은 일들이 너무나 많아 들여다볼 여유가 없던 나였다. 노트북 앞에 앉아 하루 죙일 키보드 투닥거리고 나면 '진짜 나'를 마주할 글쓰기에 내어줄 여력이 없었던 거다. 이유야 어떻든 내가 브런치로부터 슬그머니 도망쳐 나와 있을 때 브런치는 더욱 열렬히 활개를 폈다. 어쩌면 내 게으름의 핑계들이 장작이 되어 그곳을 더욱 뜨겁게 태웠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벤트 알림을 보다가 우연히 그 세계로 재입장했을 때, 꾸준히 자신의 서랍에 이야기를 담는 수많은 브런치 작가들을 보고 순수한 질투와 자극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절로 나는 왜? 나는 어째서 쓰지 않은 거지? 그 시간 동안 뭘 했지?와 같은 근본적인 물음이 생겼다. 현답이 정해져 있는 우문이었지만 그러한 자극이 내게 새 감각을 가져왔고, 다시 이 세계를 동경하게 됐다. 읽어주는 이 몇 없어도 지긋이 쌓아가는 뿌듯한 재미를 회복해가고 있다. 글자가 문장이 되고, 문장이 책이 되는 때가 따로 정해져 있거나 빠를수록 좋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먹다 보니 살이 쪄 있는 것처럼, 쓰다 보면 윤활한 글이 나오리라 믿는다. 그래서 다시 온라인 독서 모임과 가는 곳곳 책과의 동행을 시작했다. 나만의 속도대로 길은 앞을 내보일 거다.

또 하나는 장소의 변화다.

처음 계단이 있는 집에서 살게 됐을 때, 이제껏 지내온 내 방 크기를 모두 합친 정도의 곳에 나만의 공간을 마련했을 때의 설렘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꼭 금전적 여유가 많아야지만 그런 곳에 사는 건 아니라는 걸, 계속해서 꿈꾸고 관심을 두는 사람이 그런 공간 안에 신발을 벗고 맨발을 디딜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조명부터 소품, 가구까지 모든 게 충분히 완벽했고 빛나는 계획들이 있었다. 몽글몽글한 밤 혼자만의 시간에서 이뤄낸 것도 분명 있었지만 공간의 확장이 내 사고의 확장과 꼭 들어맞게 비례하진 못했다. 뜨거운 성취를 이뤄낼 '자기만의 방'인 줄 알았던 내 방에 침대가 있는 한 그곳은 여전히 침소로써의 기능을 열심히 했고, 정리정돈에 취약한 주인을 둔 탓에 구석구석 반이 접힌 영수증과 택배 봉투, 박스, 입었고 입을 예정인 옷가지, 빈 캔맥주 등이 만원을 이뤘다. 미니멀리즘이나 정리정돈 책에서 주창하는 '5분의 마법'을 지키지 못하고 잠깐의 정리 대신 회피의 카페행(行)을 택할 때도 많았다.

잠깐의 외출과는 별개로, 살면서 이렇게까지 집에 오래 있어본 적이 없다. '재택'이라는 달콤하면서도 위험한 덫에 걸려든 나는 태국 사람들보다 방콕을 사랑하게 됐다. 때문에 방 평수만큼 몸 평수가 늘어난 건 당연한 이치였다. 간헐적 단식이 한창 유행할 때 난 아무 소용도 없는 극 간헐적 운동을 했다. 그래도 요즘은 운동의 필요성을 꽤나 심각하게 느끼는 터라 줄을 다시 넘을 각오를 하고 있다. 굉음 때문에 차마 탈 수 없었던 자전거도 만 오천 원 주고 고쳤다.

사족이 길었지만, 아무튼 재택근무의 가장 큰 장점은 내 시간을 비교적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고 인터넷이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이다. 그래서 그냥 당차게 제주도 티켓을 끊었다. 집과 내 방을 가장 사랑하지만 익숙함을 잠시 접어두고 떠나기로 했다. 동행자는 최고의 여행 메이트인 엄마!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으로 갔던 제주도가 마지막이라 가본 곳이라곤 섭지코지, 우도, 주상절리 정도밖에 없다. 관광객이 아닌 생활자이고 싶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 안에 나는 그나마 능동적인 여행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들을 수도 없이 떠올리며 신나고, 설레고, 머리가 무겁다:) 다른 사람들의 브이로그, 기사, 사진들로만 봤던 제주의 하늘 아래 나를 옮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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