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곰살 Feb 09. 2020

앨런 플레처 展 : 작가는 예술로, 예술은 야생화로

[한편보고서 7] WELCOME TO MY STUDIO

언제나 많은 인파로 붐비는 홍대. KT&G 상상마당 주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방송에도 많이 나왔던 수 노래방과 그 이름이 아니면 안 되는 듯 즐비한 각종 포차들. 사람이 있건 없건 낮에는 처리되지 못한 쓰레기와 잿빛 썰렁함이, 밤엔 화려하고 부산스러운 암막이 존재하는 홍대에서 내가 그나마 좋아하는 건물은 문구류와 전시가 있는 이곳 KT&G 상상마당이다.


5층에 올라가면 코앞에 티켓부스가 있다. 매달 14,300원씩 당당하게 멜론을 이용해온 사용자로서 내가 MVIP라는 사실을 간단히 증명하고 나면 다섯 걸음도 안 되어 지하철역에 있는 턴 게이트를 통과하게 해준다. 들어서자마자 입구에 있는 포스터를 찍고 전시 기획의 글로 눈을 돌리는 순간, 진짜 감상이 시작된다. 오늘의 짝은 내 동생:)

앨런 플레처展

'뉴욕에서 런던으로(1952~1962)'

'플레처│포브스│질 (1962~1965)'

'크로스비│플레처│포브스(1965~1972)'

'펜타그램(1972~1992)'

'앨런 플레처 디자인(1992~2006)'


앨런 플레처는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예술가로서 50년 동안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긴 인물이다. 학창 시절, 해머스미스 예술학교, 중앙예술공예학교, 영국왕립예술학교 등 여러 학교를 다니며 예술을 익힌 그는 195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 예일대학교에서 학위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전후(戰後)의 어두운 분위기 속에 모더니즘 기반의 절제된 디자인이 주를 이뤘던 50년대의 런던과 달리 뉴욕은 대중매체의 발달로 시각 이미지가 쏟아지대량생산체제하에 소비주의가 확산되면서 대중의 눈을 사로잡기 위한 디자인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었다. 뉴욕에서 개성 있는 작업으로 축적한 포트폴리오와 함께 런던으로 돌아온 앨런 플레처는 영국 디자인계에 신성 같은 존재였다" -10p 기획의 글 中


포문을 연 '뉴욕에서 런던으로' 속 작품들은 포춘, 그라스피 등 매거진이나 책 표지에 삽입된 디자인들로, 활기 넘치는 뉴욕을 경험한 후 더욱 깊어진 그의 예술적 조예가 담겨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빈티지'의 원형이자 당시엔 혁신적이었을 플레처의 디자인은 간결하지만 심심하지도, 낯설지도 않았다. 처음에 이미지만 봤을 땐 몰랐던 것들을 조그맣게 적힌 제목을 보고 이해하는 재미도 있었다.


남들보다 이른 다양한 경험으로 영국 디자인의 새 지평을 연 앨런 플레처. 잡지, 책, 포스터와 같은 인쇄물부터 주요 기업 및 기관의 상징물까지 그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낱말 나열이고, 사진이고, 콜라주다. 디자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선 피에트 몬드리안의 <타블로Ⅰ> 같은 추상화를 처음 봤을 때와 같은 의문의 감상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그토록 단순하기에 지저분한 꾸밈이 없고, 후세에 남는 거장으로서 '영원한 새로움'이 되었으리라.

더 놀라운 것은 플레처와 그의 동료들이 완성한 당시의 작품들이 수작업으로 탄생했다는 점이었다. 이리저리 미리 보기를 하거나, 중간에 저장해둘 수도, 클릭 한 번에 깔끔히 지울 수도 없던 '無 컴퓨터 편집 프로그램'의 시절이기 때문이었다. 도구가 아닌 아이디어로, 고루한 설명보다 위트 있는 함축으로 플레처는 자신의 작업물을 내보였다.


한 시간이 채 안 됐을 즈음 거장의 아우라로부터 빠져나온 우리는 3-2-1층을 가득 채운 문구들을 눈으로 훑으며 제2의 관람을 마쳤고, 낙곱새로 허기도 채웠다. 다음 일정은 전시 당일 늘 치르는 신성한 의식(?) 도록 리뷰! 몇 년 전,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린 '대영박물관-영원한 인간전'을 시작으로 도록 구매는 한 번도 빼놓지 않았다. 첫날 본 후에 두 번 이상 들추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 작가의 작은 그림자를 데려온 것 같은 설렘이 있어 그것만으로도 좋다. 근처 카페로 가 전시에 대한 감상,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또 한 번 뒤집어지게 웃고, 격하게 감탄했다.


"20년 가까이 펜타그램에서 일하며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지냈던 플레처는, 클라이언트들의 의뢰를 받아 기계적으로 작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돌연 펜타그램을 나온다. 디자인은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라고 말하며, 항상 즐기면서 작업하고자 했던 플레처는 런던 노팅 힐 게이트의 자택에 개인 스튜디오를 열고 작업을 이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클라이언트들의 요구 사항을 해결하기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로서 스스로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데 집중했다" - p92 앨런 플레처 디자인 설명 中


플레처의 마지막은 '그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하나의 틀에 갇히지 않기 위해 작품의 요소들을 최대한 단순화했고,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펜글씨, 수채화, 콜라주와 같은 아날로그 기법을 고수했다. 타인의 요구에 맞춰 잘 팔리는 수작(秀作)을 만들어내거나 번듯한 건물에 속해 그럴듯한 직함을 다는 것보다, 스스로에게 되물을 수 있는 창작에 집중하는 것. 플레처 예술의 종착은 그렇게 야생화 한 송이가 되어 내 시선에 가닿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편보고서 6] 대학로 연극, 비 오는 날의 인터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