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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살 Mar 06. 2020

'발행'과 '글쓰기'는 다르다.

기분 좋지 않은 일, 더 나아가서는 화가 나고 부당하다 싶을 때, 마음과 머릿속이 오갈 데 없이 흔들거릴 때, 나는 핸드폰(혹은 컴퓨터) 메모장에 똥을 쌌다. 꿈을 꿔도 기록으로 남겼다. 입이 아닌 머리로부터 하고 싶은 말이 차오를 때 손가락은 부지런히 쏟아냈고, 핸드폰은 말없이 내 그을은 마음을 들어주었다.

'쓴다'는 행위로 인해서 온전한 자기 자신을 마주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나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위로나 응원을 얻기도 한다. 이보다 더 좋은, 유의미한 행위는 없는 것만 같다. 그러나 모든 글이 발행이라는 버튼에 맞추어 '0과 1의 세상'에 튀어나가지는 않는다. 이삿짐 속에서 우연히 발견된 편지 한 장처럼 나만의 시공간 안에 머무를 때가 더 많다. 모든 건 내 걸음에 맞추어진다.

모임을 통해 이제 막 글을 써보려는 글벗 두 명이 글쓰기를 어떤 방식으로 시작했는지, 좋았던 방식이 있는지,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 물어온 적이 있다. 서로의 삶을 전혀 모르고 살다 0과 1의 세상으로 글을 펼치고자 카톡상에서 마주한 글벗들. 그 공간에서 나로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의견은 '발행의 글쓰기'를 시작하는 방법들이었다. 이를테면 내가 본 영화나 책에 대한 간단한 요약, 그로부터 받는 느낌 또는 일상 속 단상을 적는 것 말이다. 비단 영화나 책뿐 아니라 자신만의 모든 관심사가 해당된다. 평소 글을 써볼 생각을 못했던 이에겐 벼운 시작 자체에 의의가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책 한 권을 읽고 쓰는 글에도, 몇 줄짜리 단상에도 내 삶은 투영되어 있다. 글 한 편을 발행하고 나면 항상 그림자처럼 남은 또 하나의 글이 있다. 보다 은밀하고 깊숙하지만 '발행'에 있어서만큼은 논외인 그 글은 언뜻 보면 마인드맵인 듯, 조각난 파편인 듯, 껄떡껄떡 딸꾹질인 듯 보인다. '그 헐떡거림이 언젠가 긴 호흡이 되어 보일 날이 오겠지'라는 마음으로 꺼내지 않고 삼킨다. 남들에게 보여도 괜찮은 글을 발행하지만, 그 안에 결코 허영이나 비겁은 없다. 나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글을 썼다면, 몇 명에게 읽혀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타인의 수와 속도에 내 행위에 대한 고저 경중을 나누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글은 어떻게 쓰냐에 따라 가장 사적일 수도, 공공연해질 수도 있다. 오프라 윈프리는 책을 통해 태생부터 불운했던 자신의 삶을 회고했다. 행복한 일은 없다 싶을 정도로 말 못 할 이야기들을 겪어왔던 그가 스스로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방송일과 조우했고, 그 안에서 성장하고 변화했다. 휘청이던 시기의 가장 사적인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책으로 풀어낸 오프라 윈프리의 선택. 사실 그는 방송인으로서 알리고 싶지 않았던 치부를 가족이 폭로한 뒤에야 솔직한 자기 고백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련의 과정으로부터 얻은 교훈, 성찰을 더해 책으로 냈다. 가족 중 하나가 폭로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들어주고 카운슬링해주던 그녀가 자신의 상처를 먼저 스스로 꺼내보였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라틴어 수업>의 저자 한동일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새를 보세요. 그 어떤 비둘기도 참새처럼 날지 않고, 종달새가 부엉이처럼 날지 않아요. 각자 저마다의 비행법과 날갯짓으로 하늘을 납니다. 인간도 같은 나이라 해서 모두 같은 일을 하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저마다의 걸음걸이가 있고 저마다의 날갯짓이 있어요.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고 이때 중요한 것은 '어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래의 누군가보다 못났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 없다는 격려의 의미를 담아 한 말인데, 내게는 그에 덧붙여 이렇게도 들렸다.

"삶은 A 또는 Z 형식으로 장르를 나눌 수 없습니다. 부조리를 고발해야만, 거대한 아픔에 맞서 싸운 사람만이 유의미한 발걸음은 아닙니다. 아픔과 상처는 밀물과 썰물처럼, 어느 해변가의 파도처럼 계속해서 오고 가는 것이지 정복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하고 싶을 때 하고, 쓰고 싶을 때 쓰고, 그것을 기꺼이 세상에 공유하고 싶을 때 내보이면 될 뿐. 그 사이 돈을 벌고, 밥을 먹고, 햇살 한 움큼, 웃음 몇 다발 안으며 평온한 듯 사는 것도 괜찮습니다. 작은 숨소리, 종종걸음마저도 당신의 서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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