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보고서] 세상엔 멋진 이야기와 그림이

잡지 Chaeg 3월 호 : 그림책(Picture Book)

by 곰살

[2019년 3월 26일 작성]


이번 3월 호의 주제는 '그림책'이다. 그간 책(Chaeg)의 커버들이 다소 유니크하면서도 어두웠다면, 이번엔 따뜻한 색감의 아기자기한 느낌이다. 오늘도 좋은 책(Chaeg)이 내 방 안에 쌓였다.


A picture book is a small door to the enormous world of the visual arts, and they're often the first art a young person sees. -Tomic dePaola
한 권의 그림책은 거대한 시각예술의 세계로 향하는 작은 문이며, 어린이가 보는 첫 번째 예술이기도 하다. -토미 데파올라(미국의 그림책 작가)


이번 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 그리고 내가 하려는 이야기도 이 문장에 정확히 부합한다. 짧은 시가 가장 방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동화책은 가장 많은 세계를 담고 있다. 이렇다 저렇다 말 많은 어른들의 세계를 살기 전, 가장 기본적인 모든 것들이 들어있는 동화책의 세상. 어린이들은 그곳에 먼저 다녀온다.


그림책은 가장 다양한 방법으로 읽혀졌다. 소극장 연극을 통해서, 엄마의 입에서, 내 눈으로, 카세트테이프로..늘 교훈으로 귀결되는 동화들을 접하며 '가난해도 착하게만 살면 복 받는다', '잘못하면 벌 받는다', '욕심 많던 부자는 망한다', '정직한 게 최고다' 등의 인과응보를 배웠다. 그런데, 그 이후로 꽤나 많은 해를 지나 보내면서 그 인과응보에 대한 진리를 확인했나? 되물어보면 답은 글쎄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복을 받거나 가난을 면치 못했으며 잘못한다고 무조건 벌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욕심 많은 부자는 더욱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나 홀로 정직한 건 아무도 안 알아준다. 착하게 사는 것과 잘못을 하며 사는 것, 가난한 것과 부자로 사는 것은 딱 떨어지는 공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전히 어렵고, 동화 같은 세상을 동경하며 손때 묻은 그림과 추억에 마음이 동하는 것 같다.


초등학생 시절, 글짓기와 그림대회가 있으면 98%의 확률로 글짓기를 택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발전된 과학 미래를 그리는 것과, 국경일을 기념하며 태극기를 그릴 때뿐이었다. 그만큼 그림에는 영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초등학교 3학년.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미술을 배우러 집 근처 작은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대부분 학교에서 실시하는 여러 크고 작은 대회들을 위한 그림을 배우는 곳이었다. 일단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책가방같이 생긴 몸을 그린다. 팔은 로봇처럼 우람하게 간격을 벌린 채 서있고 뒷짐을 지듯 손가락을 뒤로 빼는 것도 다반사였다. 학교에서 그림 좀 그린다 하는 아이들은 연필로 만화책 속 삐죽삐죽 만찢남녀를 그려대는데, 나는 여전히 눈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만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술 학원에서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던 중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있었다. 당시 원투쓰리도 모르던 나는 카드에 Chris-tmas라고 적었고 그걸 본 어떤 언니가 굉장히 냉소적으로 비웃었다. 그림에 흥미를 갖기도 전인데 영어부터 충격받은 나는 그 길로 미술 학원을 그만두고 튼튼 영어를 시작했다. 집 앞 보습학원도 견뎌내지 못한 후 '그림에는 소질이 없다'고 치부해버린 지 오래였다. 중고등학교에서도 미술을 진로로 결정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림을 그릴 일도, 볼 일도 딱히 없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점차 나이가 들면서 깨닫게 된 건, 그리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거다. 거창한 기법 없이도 그림이란 그저 그려진 것으로 존재할 뿐이다. 미술로 밥 벌어 먹고 살 것도 아닌데, 그냥 그리면 그뿐이지 뭐.


그림책엔 묘한 힘이 숨어있다. A4용지 기준으로 늘어놓고 보면 한 줄 정도밖에 안 될 문장에도 생생한 소리가 담긴다. 책을 읽을 때 역시 가만히 눈으로만 글자를 읊는다 해도 내가 상상하며 알고 있는 소리들을 마구잡이로 머릿속에서 재생시킨다.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닌, 상상력을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하물며 방대한 양을 담고 있는 해리 포터는 어떠할까. 해리 포터가 영화로 제작됐을 때 '원작 소설보다 재미없다'고 평했던 내 친구들이 지금은 이해가 간다.


책장을 넘기고 넘기다 '월리를 찾아라'를 보게 됐을 땐 반가움이 앞섰다. 유행 타는 책은 엄마가 잘 사주시지 않았지만 우리 집에도 한두 권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책이었다. 불과 최근까지도 추억에 젖어 결제 직전까지 갔다가 충동구매라는 생각에 발길을 돌린 게 수 번. 월리는 아직도 내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 안에 있다. 김지영 에디터의 말대로 '그저 월리를 찾는 게 전부인데' 나는 왜 그토록 열광했던 걸까? 내가 '월리를 찾아라'에서 느꼈던 가장 큰 매력은 사실 월리보다 그림체에 있었다. 빨강, 흰색, 파랑의 월리를 찾는 것보다 그건 일찍이 찾아두고 주변 세상살이를 들여다보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내 주변엔 다 똑같고 평수만 다른 아파트뿐인데 이곳 세상은 생김새도, 색깔도 저마다 달랐다. 어릴 땐 익숙지 않았던 로터리도 신기할 뿐이었다.


이번 3월 호를 읽으며 가장 위안이 되었던 부분은 밤의서점 폭풍의점장 남지영님의 '어른에게 그림책을 권함'이었다. 속수무책으로 어른이 돼버린 모두에게 건네는 위로이자 조언. 파일철이 된 듯 모든 어려운 것들을 척척 깔끔하게 정리할 줄 알았으나 현실은 하루의 고삐를 붙잡고 안달복달하는 우리네 삶. 깊이 있는 사람이 되고자 했는데 수입 창출에 혈안이 되어 야트막한 겉핥기 지식으로 연명하고 있는 삶. 꼬리가 달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며 밤의 여유를 즐기던 나는 어느새 그 시간을 꼬리 자르듯 떼어 버리고 벌이를 위한 시간으로 메꿨다. 그마저도 밤의 기운을 빌어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었으나 온전히 나만의 시간은 없었다. 뭐 하는 건지 뭘 하고자 하는 건지 뭐가 중요한지를 일부러 잊고 지낸 듯했다.


사실 이번 책 44호 리뷰단에 지원하게 된 이유도 이와 맥락이 같다. 각 잡고 읽을 분위기가 될 때까지 기다리느라 아껴둔 나의 책들 보기가 미안해서, 바쁘다 바쁘다 해도 머릿속이 제일 바쁜 요즘의 내가 안쓰러워서 숨통을 트일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책은 낭만적인 요새인 셈이다. 책 속의 에디터들이 남겨놓은 글들을 읽으면 마음이 당기고 포근해진다. 버벅거리던 정신의 바퀴에 기름칠을 해주는 느낌이다. 사진 또는 그림들 역시 기발하고 로맨틱해서 언제든 꺼내 읽어도 좋다. 이 모든 이유로 구독했던 모든 책(Chaeg)을 한 권도 빠짐없이 보관 중이다.


우연찮게도 며칠 전 엄마와 디뮤지엄 'I DRAW : 그리는 것보다 멋진 건 없어' 전시를 보고 왔다. 전시에 대한 감상은 따로 정리해 볼 생각이지만 또다시 느끼게 된 건 "관심 갖고 좋아하는 것들이 자석처럼 내게 끌어당겨진다는 것"이었다. 흥미를 잃지 말라고 더 많이 느껴보라고, 이렇게나 멋진 이야기와 그림이 가득하다고 세상만사가 내게 일러주는 것 같았다.


CONTENTS

만든 사람들

시작하는 글

삶의 아틀라스 : 어린 시절 상상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 by Catherine Rondeau

저널 1 : 글로는 다 할 수 없는

저널 2 : '주간 어린이책 편집자'란 무엇인가

저널3 : 어른에게 그림책을 권함

이달의 토픽 : 다시 그림책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책이 선택한 책 : 불친절하고 사적인 책 선택 / 사전책방문 / 불편한 이야기 / 소우주의 발견, 독립출판물 / 좋은 걸 어떡해

어디까지나 사적인 문장수집가

이달의 작가 : 영원히 유일할 그림책, 존 버닝햄

특별기획 세계의 도서관을 가다 : 집 없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선물하다, 콘코스 하우스 어린이 도서관

인터뷰 1 : 삶을 물들이는 색, 작가 이수지

인터뷰 2 : 새로운 생각을 만드는 힘, 저자 최혜진

책 속 이야기(예술) : 민화의 세계에서 만나요, 이상한 나라의 정지오

책 속 이야기(예술) : Where is Wally?

세상의 모든 책방 : 잃어버린 그림책을 찾아서

포토 인터뷰 : 어서 오세요, 그림책 세상으로

방 안의 코끼리 : 베스트셀러의 유혹, 베르나르 베르베르

이달의 수

책과 함께 사는 삶 : 상상을 넘나드는 책의 공간, 현대어린이책미술관

동화 꼬리잡기 : 잃어버린 나, 너 그리고 우리 / 작지만 함께 한다면 『헤엄이』

소식 : 국내·해외 출판 소식

새로 나온 책

프라임 : 나의 미술관

시가 흐르는 시간 : 세계를 가득 채우는 선물 '알리칸테'

영화로 태어난 책 : <과물들이 사는 나라>

맛으로 만나는 책 : 맛잇는 그림 그리기 '파네수프'

뒷맛이 쩜쩜쩜 : 하루키의 글이 있는 그림책

끝맺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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